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경순(景醇), 호는 사숙재(私淑齋) · 운송거사(雲松居士) · 국오(菊塢) · 만송강(萬松岡). 강시(姜蓍)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동북면순무사(東北面巡撫使) 강회백(姜淮伯), 아버지는 지돈녕부사 강석덕(姜碩德), 어머니는 영의정 심온(沈溫)의 딸이다. 형이 인순부윤(仁順府尹)이자 화가 강희안(姜希顔)이며, 이모부가 세종이다.
1447년(세종 29) 24세로 친시문과에 장원급제한 뒤 종부시주부(宗簿寺主簿)가 되었다. 1450년 예조좌랑과 돈녕판관을 역임하고, 1453년(단종 1) 예조정랑이 되었다. 1455년(세조 1)에 원종공신 2등에 책봉되었고, 그 뒤 예조참의 · 이조참의를 거쳐, 1463년 중추원부사로서 진헌부사(進獻副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듬해 부윤으로서 어제구현재시(御製求賢才試)에 2등으로 합격하고, 1466년 발영시(拔英試)에 3등, 등준시(登俊試)에 2등으로 급제했다. 세조의 총애를 받아 세자빈객이 되었으며, 예조판서를 거쳐 1467년에는 형조판서로 특배되었다.
1468년(예종 즉위년)에 남이(南怡)의 옥사(獄事)를 다스린 공으로 이듬해 익대공신(翊戴功臣) 3등에 책봉되어 진산군(晉山君)에 봉해지고, 1471년(성종 2)에는 좌리공신(佐理功臣) 3등에 책봉되었다. 그해에 지춘추관사로서 신숙주(申叔舟) 등과 함께 『세조실록』 · 『예종실록』의 편찬에 참여했다.
1473년에는 병조판서가 되고, 이어서 판중추부사 · 이조판서 · 판돈녕부사 · 우찬성을 역임한 뒤, 1482년에 좌찬성에 이르렀다. 인품이 겸손하고 치밀해 맡은 일을 잘 처리했으며, 또 경사(經史)와 전고(典故)에 통달했던 당대의 뛰어난 문장가였다.
사대부로서의 관인적 취향과 섬세한 감각을 가진 문인이면서도 농촌 사회에 전승되고 있는 민요와 설화에 깊은 관심을 가져 관인문학(官人文學)의 고답적인 자세를 스스로 파괴했다.
『농구십사장(農謳十四章)』은 생활 주변에서 채집한 농요를 모아 정리한 것으로 농민들의 애환과 당시 농정(農政)의 실상이 잘 묘사되어 있으며, 강희맹의 시 중에서 그것보다 앞서는 것이 없다는 평을 받았다.
할아버지와 아버지, 형의 시집인 『진산세고(晉山世稿)』를 편찬했으며, 세조 때 『신찬국조보감(新撰國朝寶鑑)』 · 『경국대전』의 편찬과 사서삼경의 언해, 성종 때는 『동문선』 · 『동국여지승람』 · 『국조오례의』 · 『국조오례의서례』 등의 편찬에 참여했다.
또한, 소나무와 대나무 및 산수화를 특히 잘 그렸는데, 현재 일본의 도쿄국립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독조도(獨釣圖)」는 강희맹의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글씨로는 원각사비(圓覺寺碑)의 액전(額篆), 아버지와 강지돈(姜知敦) 묘표의 액서(額書), 합천홍류동체필암각(陜川紅流洞泚筆巖刻) 등을 썼다.
저서로는 성종의 명에 따라 서거정(徐居正)이 편찬한 『사숙재집(私淑齋集)』 17권 이외에 『금양잡록(衿陽雜錄)』 · 『촌담해이(村談解頤)』 등이 전하고 있다. 시호는 문량(文良)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