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태사 ()

논산 개태사 전경
논산 개태사 전경
불교
유적
충청남도 논산시 연산면에 있는 고려전기 제1대 태조 왕건이 창건한 사찰.
내용 요약

개태사는 충청남도 논산시 연산면에 있는 고려전기 제1대 태조 왕건이 창건한 사찰이다. 고려 태조 왕건이 후백제를 멸망시키고 전승 기념으로 세운 사찰로, 후백제 신검의 항복을 받아낸 상징적 장소인 왕건의 숙영지에 건립되었다. 고려시대 말까지 거찰의 규모를 유지했으나 왜구의 약탈과 방화로 급격히 쇠퇴하였고 조선시대에 들어와 폐사되었다가 1934년에 중창되었다. 개태사 북쪽의 개태사지는 왕건 사후 고려 광종대에 창건 또는 중수된 사찰 터이다. 개태사 마당의 오층석탑은 개태사지에서 옮겨온 것이고 개태사지의 석조여래삼존입상은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목차
정의
충청남도 논산시 연산면에 있는 고려전기 제1대 태조 왕건이 창건한 사찰.
내용

개태사(開泰寺)는 936년(태조 19)에 고려의 왕건이 후백제를 제압하고 세운 사찰이다. 근래에 들어와 수차례 발굴 조사되었는데, 최근 법당 등을 복원한 개태사 구역과 원래의 개태사지로 구분된다. 개태사지는 개태사 석조삼존불입상이 있는 현재의 개태사로부터 북쪽으로 약 300m 떨어진 곳에 있다. 개태사에 전하는 문화재로는 석조삼존불입상과 오층석탑, 철확 등이 있고 개태사지에서는 석조공양보살상과 석조(石槽) 등이 수습되었다. 개태사 마당에 세워져 있는 오층석탑은 개태사지에서 옮겨온 것인데, 원래는 석조공양보살상과 한 짝을 이루고 있었다. 즉 이 석탑 앞에 석조공양보살상이 탑전 공양보살상의 형태로 놓여 있었다. 현재 석조공양보살상은 개태사지 부근에 위치한 용화사 법당에 봉안되어 있다. 석조공양보살상은 두부가 결실되어 있으며 오른쪽 무릎을 땅에 대고 두 손을 가슴 앞에 모은 형상이다.

개태사 석조삼존불입상이 세워져 있는 현재의 개태사 구역은 936년 태조의 명으로 창건되기 시작하여 940년 완공되었다. 개태사 북쪽에 위치한 개태사지는 태조 사후에 정비된 지역이다. 개태사지는 불전지와 진전지로 구분되며 중앙에는 출입시설이 있었다. 주요 출입구가 진전지와 불전지 사이에 위치해 있는 점으로 보아 두 사역(寺域)은 동시기에 건립된 것으로 파악된다. 특히 개태사지는 출토된 막새를 통해서 조성 시기를 확인할 수 있는데, 출토된 기와 중 가장 시기가 이른 것은 꽃술대가 시문된 수막새 기와이다. 이 기와는 954년(광종 5)에 창건된 충주 숭선사지 초창기 기와와 매우 유사하다. 충주 숭선사지를 비롯하여 청주 흥덕사지, 안성 봉업사지 등에서도 동일한 문양의 막새기와가 출토된 바 있다. 이러한 막새기와가 출토된 지역은 954년을 전후한 시기인 광종 재위 전반기에 창건되거나 중수된 사찰로 보는 것이 통상적이다. 따라서 개태사지 석조공양보살상 역시 광종대 조성된 것임을 알 수 있다.

태조 왕건이 개태사의 낙성을 기념해 직접 작성한 「개태사화엄법회소」에 따르면, 일리천 전투에서 패배한 후백제의 신검이 마성(馬城)에 주둔하고 있었던 왕건에게 와서 항복을 청하였다고 한다. 신검이 항복을 청한 장소는 당시 고려군 지휘부가 주둔했던 왕건의 숙영지라 할 수 있는데, 현재 개태사 주변에 있는 토성이 바로 마성으로 비정되고 있다. 특히 개태사 석조삼존불입상이 세워진 자리가 마성의 중심부에 해당하는데, 이 위치가 바로 신검이 왕건에게 항복한 장소로 추정된다. 즉 이곳 개태사는 고려의 태조 왕건이 후백제로부터 최후의 항복을 받은 역사적 장소이며, 마침내 후삼국 통일의 대업을 이룬 상징적인 장소인 셈이다.

개태사에 관한 역사 기록은 고려 말 홍건적왜구의 침입과 관련하여 다시 등장한다. 1361년(공민왕 10) 홍건적의 침입으로 개경이 함락되자 공민왕은 안동으로 피난하였다. 이후 피난에서 돌아오던 길에 공민왕은 수도를 강화도로 천도할 계획을 세우게 되는데, 이를 확신하기 위해 태조영전이 있는 개태사에 신하를 보내어 천도에 관한 점을 치게 하였다. 결국 불길한 점괘가 나와 천도 계획은 중지되었다. 한편 1383년(우왕 9)에는 왜구 천여 명이 내륙으로 들어와 보은을 거쳐 개태사를 경유해 계룡산에 웅거하였으며, 창왕 즉위년에는 개태사에 침범해 노략질하기도 하였다. 후삼국 통일을 기념해 태조 왕건이 세운 개태사는 고려 말기까지 거찰의 규모를 유지하며 지역의 거점 사찰로서 기능하였지만, 고려말 왜구의 약탈과 방화로 급격히 쇠퇴하였고, 이후 조선시대에 들어와 폐사되었다.

의의와 평가

개태사는 고려의 태조 왕건이 후백제를 멸하고 전승기념으로 세운 사찰이다. 새로운 통일왕조 고려의 본격적인 시작을 알리고자 했던 상징적인 장소로서 의미를 갖고 있으며, 1963년 보물로 지정된 논산 개태사지 석조여래삼존입상이 유명하다.

참고문헌

『태봉과 고려: 석조미술로 보는 역사』(정성권, 학연문화사, 2015)
『개태사지』(공주대 박물관, 2002)
「개태사 석조삼존불입상 조성배경 재고: 태조 왕건군 둔영지 마성의 위치와 관련하여」(정성권, 『백산학보』91, 2012)
「개태사 석조삼존불입상 연구: 새로운 통일왕조 고려의 출현과 불교조각」(최성은, 『미술사논단』16·17, 2003)
집필자
정성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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