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인 ()

조선시대사
인물
조선 후기 임진왜란 당시 해상 및 육상에서 활약하였던 무관.
이칭
원중(元仲)
시호
충숙(忠肅)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미상
사망 연도
미상
본관
김해(金海)
출생지
순천부 별량면 대려동(大閭洞)
주요 관직
임치첨사(臨淄僉使)|가선대부(嘉善大夫)
관련 사건
칠천량해전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내용 요약

김대인은 조선 후기 임진왜란 당시 활약하였던 무관이다. 어려서 중이 되었다가 환속하여 20세에 무과에 급제하였다. 임진왜란 때 수군에서 활동하다가 칠천량해전에서 살아남아 곧장 능성현으로 가서 예성산을 왜적으로부터 굳게 지켰다. 순천왜교성전투에 참전하였으며, 임진왜란 이후 임치첨사 및 가덕첨사에 제수되었다.

정의
조선 후기 임진왜란 당시 해상 및 육상에서 활약하였던 무관.
가계 및 인적 사항

본관은 김해(金海), 자는 원중(元仲), 시호는 충숙(忠肅)이다. 부친은 유손(騮孫)이며, 순천부 별량면 대려동(大閭洞)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중이 되었다가 환속하여 20세에 무과에 급제하였다.

주요 활동

임진왜란 발발 당시 전라좌수영 인근의 석보촌(현 여수시 석창)에 살고 있었는데, 전라좌수사 이순신이 그의 담력을 높이 평가하여 막하에서 활동하게 하였다. 수년간 수군에 속하여 한산도를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정유재란이 일어나고 7월, 칠천량해전에서 수군이 크게 패하여 대부분의 전선이 침몰하면서 바다에 빠졌으나 사흘간 헤엄쳐 살아남았다. 그 후 능성현으로 가서 의병을 모집하여 연해지역에서 교전하였다. 조명연합군(朝明聯合軍)이 지키고 있던 남원성이 함락되면서 광주 · 나주 등 전라도 전역이 일본군에 점거되었다.

이때 김대인은 능성의 예성산(禮城山, 왜성산)에 주둔하였다. 예성산 정상부에는 암석으로 둘러싸인 ‘왜성’이 있었는데, 김대인은 김명철 등 의병들과 함께 이 산성을 굳게 지켜 보전하였다. 당시 이 사건과 관련하여 명나라 부총(副總) 이여매(李如梅)가 선조에게 김대인의 활약을 칭찬하며 크게 기용할 것을 권하였다.

1598년 순천왜교성전투(順天倭橋城戰鬪)에도 참전하여 대나무로 활과 화살을 만들어 왜적을 무찔렀다. 그 후 임치첨사(臨淄僉使) 및 가덕첨사(加德僉使)에 제수되었다. 1600년 여러 군공을 인정받아 당상관에 올랐으며, 종2품 가선대부(嘉善大夫)까지 이르렀다.

상훈과 추모

1605년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2등에 녹훈되었는데, 정3품 당상관인 “折衝 金大仁(절충 김대인)”이라 기록되었다. 1816년(순조 16)에는 임진왜란 때의 절개로 정문(旌門)을 세우도록 하였다. 1878년(고종 15) 자헌대부 병조판서에 추증되면서 충숙(忠肅)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1946년 유림과 후손들이 송천사(松川祠)를 세우고 묘를 별량면 첨산 아래에 지었다. 현재 묘소는 순천시 별량면 송천1길 59(동송리 408) 송천서원 뒤편에 있다.

참고문헌

원전

『강남악부(江南樂府)』
『김해김씨삼현파충숙공계보(金海金氏三賢派忠肅公系譜)』
『난중일기(亂中日記)』
『능주읍지(綾州邑誌)』
『선조실록(宣祖實錄)』
『순조실록(純祖實錄)』
『순천부읍지(順天府邑誌)』
『신증승평지(新增昇平志)』
『여지도서(輿地圖書)』
『은봉전서(隱峯全書)』
『일성록(日省錄)』
『호남절의록(湖南節義錄)』
• 항목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사실과 다른 내용, 주관적 서술 문제 등이 제기된 경우 사실 확인 및 보완 등을 위해 해당 항목 서비스가 임시 중단될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단,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미디어ID
저작권
촬영지
주제어
사진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