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덕명(金德明, 1845~1895)은 1845년 10월 27일 전라도 금구 용계(지금의 전북특별자치도 김제시 금산면 쌍용리 용계마을)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언양(彦陽)이다. 본명은 준상(峻相)이며, 자가 덕명(德明)이다. 18세가 되던 1862년에 글공부를 마쳤으며, 1886년에 동학에 입도(入道)하였다.
김덕명은 전봉준, 김개남, 최경선, 손화중 등과 더불어 동학운동을 대표하는 지도자의 한 사람이었으며, 금구 지역의 대접주(大接主)였다. 1886년에 동학에 입도한 그는 1887년에 원평에 도소(都所)를 설치하여 포교에 힘썼고, 1891년 6월에는 교주 최시형이 원평에 있는 김덕명의 집으로 와서 많은 도인들을 만나 포덕(布德) 행사를 벌였다.
1892년 교조신원운동 과정에서는 원평집회를 주도하였으며, 1893년 2월에는 광화문 복합상소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1894년 4월 무장기포 이후 백산집회, 전주성 점령, 원평전투 등에서도 중요한 지위에 있었다. 아울러 전주화약(全州和約) 이후에는 원평 지역에 집강소를 설치하고 폐정개혁을 지휘하였다. 1894년 동학운동 당시 일본군에 맞서 저항하다가, 1895년 3월 29일 전봉준 · 손화중 · 최경선 등과 함께 처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