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로는 해방 이후 남조선과도정부 사법부 부장, 대법원장 등을 역임한 법조인이자 정치인이다. 1887년(고종 24)에 태어나 1964년에 사망했다. 1910년 일본에 유학하여 법학을 전공했다. 귀국 후 형법과 소송법 강의를 하며 경성지방법원 소속 변호사로 개업했다. 독립운동 관련 사건을 무료 변론하며 다방면의 사회활동으로 독립운동에 공헌했다. 해방 후 한국민주당 창당에 참여했고, 남조선과도정부 사법부장, 초대 및 제2대 대법원장을 지냈다. 대법원장 재임 동안 사법부 밖에서 오는 온갖 압력과 간섭을 뿌리치고 사법권 독립의 기초를 다졌다.
유년시절 부모가 서울에서 머물렀기 때문에 조부모 슬하에서 자랐고, 13세에 담양 정씨(潭陽鄭氏)와 혼인하였다. 17세 때 한말 거유(巨儒)인 전우(田愚)에게 한학을 배우고, 18세 때 담양의 일신학교(日新學校: 강습소)에서 서양인 선교사로부터 산술과 서양사 등 신학문을 접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된 해에 향리의 용추사(龍湫寺)를 찾아온 최익현(崔益鉉)의 열변에 감화, 1906년 20세 때 70여 명의 의병과 함께 순창읍 일인보좌청(日人補佐廳)을 습격하였다.
1906년 창평(昌平)의 창흥학교(昌興學校)에 입학했으며, 1910년 일본으로 건너가 니혼대학[日本大學] 전문부 법학과와 메이지대학[明治大學] 야간부 법학과에 입학하여 동시에 두 학교를 다녔으나 폐결핵으로 귀국했다. 1912년에 다시 도일하여 메이지대학에 복학하여 이듬해 졸업하고, 1914년 주오대학[中央大學] 고등연구과를 마치고 귀국했다. 일본 유학 중에 잡지 『학지광(學之光)』의 편집장을 지냈고, 한편으로는 금연회(禁煙會)를 조직하여 조선 유학생의 학자금을 보조했다.
귀국한 뒤 경성전수학교(京城專修學校: 京城法律專門學校의 전신)와 보성법률상업학교(普成法律商業學校: 普成專門學校의 전신)의 강사로 형법과 소송법 강의를 맡았으며, 1919년 경성지방법원 소속 변호사로서 개업했다. 변호사 시절 많은 독립운동 관련사건을 무료 변론하였으며, 여러 방면에서 사회활동으로 독립운동에 공헌했다. 1923년 허헌(許憲) · 김용무(金用茂) · 김태영(金泰榮) 등과 서울 인사동에 형사공동연구회를 창설하였다. 겉으로는 연구단체임을 내세웠으나 실제로는 항일 변호사들이 공동전선을 형성, 법정을 통해 ‘독립운동이 무죄’임을 주장하는 독립운동 후원단체였다. 이 연구회는 독립투사들에 대한 무료 변론뿐만 아니라 그들의 가족을 돌보는 일까지 했다.
10여 년 동안 맡았던 사건 가운데에는 여운형 · 안창호 등에 대한 치안유지법위반사건, 김상옥의사사건(金相玉義士事件), 광주항일학생운동, 6 · 10만세운동, 정의부 · 광복단사건, 조선공산당사건 등이 있었다. 한편 1927년에 이상재(李商在)의 뒤를 이어 신간회(新幹會)의 중앙집행위원장이 되었고, 광주학생사건 때는 진상조사위원으로 활약하였다. 1932년 보성전문학교의 이사로서 운영난을 타개하기 위하여 김성수(金性洙)에게 인수를 알선하였으며, 신간회가 해체되고 사상사건(思想事件)의 변론에서도 제한을 받게 되자, 1932년부터는 경기도 양주군으로 내려가 농사를 지으면서 광복될 때까지 13년간을 은둔생활로 일관하였다. 따라서 창씨개명을 하지 않았고, 일제의 배급도 받지 않았다.
광복이 되면서 잠시 한국민주당 창당에 참여하여 중앙감찰위원장이 되었고, 1946년 남조선과도정부 사법부장을 지냈다. 1948년초대 대법원장, 1953년 제2대 대법원장이 되어 1957년 70세로 정년퇴임하였다. 정년퇴임 뒤에도 재야 법조인으로서 활약했으며, 1955년 고려대학교 명예법학박사학위를 받았으며, 1960년 자유법조단 대표, 1963년 민정당(民政黨) 대표최고위원과 국민의 당의 창당에 참여하여 대표최고위원으로 윤보선(尹潽善) · 허정(許政)과 함께 야당통합과 대통령 단일후보 조정작업 등 야당활동을 전개하였다.
대법원장 재임 9년 3개월 동안 사법부 밖에서 오는 모든 압력과 간섭을 뿌리치고 사법권 독립의 기초를 다졌다. 1952년 부산정치파동 직후 대법관들에게 “폭군적인 집권자가 마치 정당한 법에 의거한 행동인 것처럼 형식을 취해 입법기관을 강요하거나 국민의 의사에 따르는 것처럼 조작하는 수법은 민주법치국가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며, 이를 억제할 수 있는 길은 오직 사법부의 독립뿐이다.”라고 강조하였다. 김병로에게 있어 사법권의 독립과 재판의 독립성은 한치도 양보할 수 없는 절대명제였다.
6 · 25전쟁 때 다리가 절단되었으나 의족을 짚고 등원할 만큼 강인하고 강직한 성품이었으며, 세태의 변전에도 조금도 흔들리지 않은 곧은 절개는 후인들에게 깊은 감명과 교훈을 주고 있다. 1964년 1월 13일 간염으로 서울 인현동 자택에서 사망하였다.
사회장으로 서울 수유리에 안장되었으며, 1963년 건국공로훈장 독립장이 수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