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원립 ()

조선시대사
인물
조선 후기에, 부안현감, 능주목사, 종성부사 등을 역임한 문신.
이칭
사탁(士卓)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590년(선조 23)
사망 연도
1649년(인조 27)
본관
경주(慶州)
주요 관직
종성부사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정의
조선 후기에, 부안현감, 능주목사, 종성부사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사탁(士卓). 할아버지는 김준걸(金俊傑)이고, 아버지는 찰방 김성진(金聲振)이며, 어머니는 유전(柳㙉)의 딸이다. 아들이 정랑 김민교(金敏敎)이고, 손자는 경기도 관찰사를 지낸 김재현(金載顯)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613년(광해군 5) 성균관에 들어가 유학자로서의 소양을 갖추었으며, 인목대비 폐모론이 일어나자 분개하여 홍무적(洪茂績)과 함께 모자의 대의를 밝히는 복합소를 올렸다. 이로 인하여 광해군의 미움을 받아 하옥당하고 홍무적은 유배되었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풀려나 의금부도사에 임명되고, 1627년 정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이듬해 가주서(假注書)로서, 종묘에 제사지낼 때 임금을 수행한 공으로 일자(一資)를 올려받았다. 1630년 지평이 되고 1635년 반숙마(半熟馬) 1필이 하사되고 헌납(獻納)이 되었다.

그 뒤 계속하여 장령(掌令)·사예(司藝)·직강(直講)·예조좌랑·예조정랑·호조정랑·통례원우통례(通禮院右通禮) 등을 두루 거쳤으며, 외직으로 해운판관·부안현감·능주목사 등을 지냈다.

1647년 함경도 종성부사에 이르렀으나, 사냥을 일삼다가 종성·회령부의 백성 24인과 말 10필이 오랑캐의 포로가 되는 일이 발생하여 체포되었다. 소무영국원종(昭武寧國原從)의 공훈으로 예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참고문헌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인조실록(仁祖實錄)』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국조방목(國朝榜目)』
• 항목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사실과 다른 내용, 주관적 서술 문제 등이 제기된 경우 사실 확인 및 보완 등을 위해 해당 항목 서비스가 임시 중단될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단,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미디어ID
저작권
촬영지
주제어
사진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