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직은 조선전기 병조참판, 홍문관제학, 공조참판 등을 역임한 문신이자 학자이다. 1431년(세종 13)에 태어나 1492년(성종 23)에 사망했다. 정몽주와 길재의 학통을 계승하여 김굉필-조광조로 이어지는 조선시대 도학 정통의 중추적 역할을 했다. 세조의 왕위찬탈을 풍자해 지은 「조의제문」이 무오사화가 일어나는 원인이 되어 사후에 부관참시되었다가 중종반정으로 신원되었다. 화려한 문장보다는 정의를 숭상하고, 시비를 분명히 밝히려는 의리를 중요하게 여겼다. 문장에 뛰어나 『점필재집(佔畢齋集)』을 비롯한 많은 시문과 일기를 남겼다.
1453년(단종 1) 진사가 되고, 1459년(세조 5) 식년문과에 정과로 급제하였다. 이듬 해 사가독서(賜暇讀書: 휴가를 얻어 독서에 전념)하였으며, 1462년 승문원박사 겸 예문관봉교에 임명되었다. 이듬 해 감찰이 되고, 이어서 경상도병마평사 · 이조좌랑 · 수찬 · 함양군수 등을 거쳤으며, 1476년(성종 7) 선산부사가 되었다. 1483년 우부승지에 올랐으며, 이어서 좌부승지 · 이조참판 · 예문관제학 · 병조참판 · 홍문관제학 · 공조참판 등을 역임하였다.
1486년에는 신종호(申從濩) 등과 함께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을 편차(編次)하여 문장가다운 면모를 보여주었다. 또한 훗날 제자 김일손(金馹孫)이 사관으로서 사초에 수록하여 무오사화의 단서가 된 김종직의 「조의제문(弔義帝文)」은 중국의 고사를 인용하여 의제와 단종을 비유하면서 세조의 왕위찬탈을 비난한 것으로, 깊은 역사적 식견과 절의를 중요시하는 도학자로서의 참모습을 보여주었다.
세조 · 성종 대에 걸쳐 벼슬을 하면서 항상 절의와 의리를 숭상하고 실천하였으며, 그 정신이 제자들에게까지 전해져 이들 또한 절의를 높이고 의리를 중히 여기는 데 힘썼다. 이러한 연유로 자연히 사림들로부터 존경받는 인물이 되었고, 당시 학자들의 정신적인 영수가 되었다.
이들 사림들이 당시 훈척(勳戚) 계열의 비리와 비도(非道)를 비판하고 나서자, 이에 당황한 유자광(柳子光) · 정문형(鄭文炯) · 한치례(韓致禮) · 이극돈(李克墩) 등이 자신들의 방호를 위해 1498년(연산군 4) 무오사화를 일으켰다. 그 결과 많은 사림들이 죽거나 귀양을 가게 되었고, 김종직도 생전에 써둔 「조의제문」과 관련되어 부관참시(剖棺斬屍)를 당하였다.
고려 말 정몽주(鄭夢周) · 길재(吉再)의 학통을 이은 아버지로부터 수학하여 후일 사림의 조종이 되었다. 김종직은 문장 · 사학(史學)에도 두루 능했으며, 절의를 중요시하여 조선시대 도학(道學)의 정맥을 이어가는 중추적 구실을 하였다. 김종직의 도학사상은 제자인 김굉필(金宏弼) · 정여창(鄭汝昌) · 김일손 · 유호인(兪好仁) · 남효온(南孝溫) · 조위(曺偉) · 이맹전(李孟專) · 이종준(李宗準) 등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특히 김종직의 도학을 정통으로 계승한 김굉필은 조광조(趙光祖)와 같은 걸출한 인물을 배출시켰다.
김종직의 도학이 조선시대 도통(道統)의 정맥으로 이어진 것은 「조의제문」에서도 나타나듯이 김종직이 추구하는 바가 화려한 시문이나 부 · 송 등의 문장보다는 궁극적으로 정의를 숭상하고, 시비를 분명히 밝히려는 의리를 중요하게 여긴 점이 높이 평가되었기 때문이다.
김종직은 문장에 뛰어나 많은 시문과 일기를 남겼다. 저서로는 『점필재집(佔畢齋集)』 · 『유두유록(遊頭流錄)』 · 『청구풍아(靑丘風雅)』 · 『당후일기(堂後日記)』 등이 있으며, 편저로는 『일선지(一善誌)』 · 『이존록(彝尊錄)』 · 『동국여지승람』 등이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무오사화 때 많은 저술들이 소실되어 김종직의 진정한 학문적 모습을 이해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중종반정으로 신원되었으며, 밀양의 예림서원(藝林書院), 선산의 금오서원(金烏書院), 함양의 백연서원(柏淵書院), 김천의 경렴서원(景濂書院), 개령의 덕림서원(德林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