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밀양(密陽). 할아버지는 봉의의좌(奉醫醫佐) 박인기(朴仁杞)이고, 아버지는 삼사좌윤(三司左尹) 박천경(朴天卿)이며, 어머니는 검교군기감수녕(檢校軍器監收寧) 위윤경(魏允敬)의 딸이다.
나면서부터 기골이 남달랐다. 형인 박사자(朴獅子)가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였으나 요절하였으므로 부모가 경서와 『사기(史記)』를 읽히지 않았다. 12세에 능히 활을 잘 쏘고, 장성하여 검교중랑장이 되었다. 산원(散員)에 올라 서경도원수의 휘하에 예속되었다. 1384년(우왕 10)에 별장이 되었으나 형인 절제사(節制使) 박언충(朴彦忠)과 함께 향리에 돌아왔다.
조선이 건국되자 무예로서 갑사(甲士)가 되어 금군에 소속되었는데, 사직(司直)을 거쳐 호군(護軍)에 오르고, 1414년(태종 14)에 제물량(濟物梁)·병산포(竝山浦)의 만호 등을 역임하고, 행직(行職)으로 3군진무(三軍鎭撫)가 되어, 1418년에 중직대부(中直大夫) 사재감정(司宰監正)이 되었다가, 그 다음 해에 좌사금(左司禁)이 되었다.
1419년(세종 1)에 이종무(李從茂) 등으로 하여금 군사 1만 7000여 인과 전함 220여 척을 3군으로 나누어 거느리고 대마도를 토벌하게 하였다. 이때에 대신들이 박홍신이 다시 수군을 거느리면 바다 길을 잘 안다고 아뢰어, 좌군병마사가 되어 절도사 박실(朴實)에 예속되었다. 형 박언충도 중군병마사로서 함께 종군하였다. 대마도에 이르러 이망군(尼忘郡) 싸움에서 전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