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충선 ()

모하당문집
모하당문집
조선시대사
인물
조선시대 가선대부, 자헌대부, 정헌대부 등을 역임한 무신.
이칭
선지(善之)
모하당(慕夏堂)
이칭
사야가(沙也加)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571년(선조 4)
사망 연도
1642년(인조 20)
본관
김해(金海)
출생지
일본
관련 사건
임진왜란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정의
조선시대 가선대부, 자헌대부, 정헌대부 등을 역임한 무신.
개설

본명은 사야가(沙也加). 본관은 김해(金海). 자는 선지(善之), 호는 모하당(慕夏堂).

생애 및 활동사항

1592년 임진왜란 때 가토[加藤淸正] 휘하의 좌선봉장으로 침입하였다가 경상좌병사 박진(朴晉)에게 귀순하였다.

그 뒤 경주·울산 등지에서 전공을 세워 첨지의 직함을 받았으며, 정유재란 때는 손시로(孫時老) 등 항복한 왜장과 함께 의령전투에 참가하여 많은 공을 세웠다. 이러한 전공을 가상히 여긴 조정으로부터 가선대부를 제수받고, 이어서 도원수 권율(權慄), 어사 한준겸(韓浚謙) 등의 주청으로 성명을 하사받았으며 자헌대부(資憲大夫)에 승품되었다.

뒤에 야인들의 침입으로 변경이 소란하자 종군을 자원하여 10여 년 동안 방수(防戍: 변방 방위)에 봉직하였으며, 1613년(광해군 5) 정헌대부(正憲大夫)가 되었다. 1624년(인조 2) 이괄의 난 때 그 부장 서아지(徐牙之)를 잡아 죽인 공으로 사패지(賜牌地)를 받았으나 사양하고 수어청의 둔전으로 사용하도록 하였다.

1636년 병자호란 때는 스스로 광주(廣州)의 쌍령(雙嶺)에 나아가 싸워 큰 전과를 올렸다. 1643년 외괴권관(外怪權管)으로 국경수비를 맡고 있던 중 청나라 칙사의 항의로 해직되어 대구의 녹리(鹿里: 목장을 할 수 있는 땅으로 在野를 의미함)로 돌아왔다.

목사 장춘점(張春點)의 딸과 혼인하여 살면서 가훈·향약 등을 마련하여 향리교화에 힘썼다. 저서로는 1798년(정조 22)에 간행된 『모하당집(慕夏堂集)』 3권이 전한다.

참고문헌

『선조실록(宣祖實錄)』
『인조실록(仁祖實錄)』
『모하당집(慕夏堂集)』
관련 미디어 (3)
• 항목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사실과 다른 내용, 주관적 서술 문제 등이 제기된 경우 사실 확인 및 보완 등을 위해 해당 항목 서비스가 임시 중단될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단,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미디어ID
저작권
촬영지
주제어
사진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