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의령(宜寧). 자는 택지(澤之), 호는 회곡(晦谷)·대몽(大夢). 할아버지는 남맹하(南孟夏)이고, 아버지는 무주현감 남복시(南復始)이며, 어머니는 좌의정 김명원(金命元)의 딸이다.
1606년(선조 39) 사마시에 합격하였으나, 광해군의 난정(亂政)으로 과거를 단념하고 용인에서 살았다.
인조반정 후 태릉참봉이 되었다가 주부(主簿)·호조좌랑·황주판관·사복시판관(司僕寺判官)을 거쳐 고산현감을 지내고, 1629년(인조 7)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사헌부지평을 거쳐 이듬해 안악군수가 되었다.
이때에 명나라 장수 유흥치(劉興治)가 거느린 군졸들이 가도(椵島)를 근거지로 하여 해안에서 도적행위를 자행하므로, 이를 엄히 다스려 다시는 침범하지 못하게 하였다. 1633년 해주목사로 승진, 이듬해 황해도관찰사가 되고, 1436년 병자호란 때는 호조참의로서 남한산성에서 왕을 호위했다.
평안도관찰사로 나갔다가 모함을 받아 벼슬에서 물러났다. 1638년 다시 온성부사에 기용되고 뒤이어 함경도병마절도사가 되었다가, 1641년(인조 19) 예조참의·동부승지를 거쳐 이듬해 전라도·강원도의 관찰사를 역임하고, 1645년 병조참의가 되어 동지사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이듬해 대사간·좌부승지, 1648년 도승지, 1649년(효종 즉위년) 경기도관찰사·대사헌, 이듬해 경기도관찰사, 1652년(효종 3) 형조·예조의 판서를 거쳐 1654년 세자시강원우빈객(世子侍講院右賓客)·의정부우참찬과 이조·형조의 판서를 지냈다.
여러 번 지방관직을 지내면서 일을 바르게 처리하고 선정을 베풀어 부임하는 곳마다 송덕비가 세워졌다. 시호는 정민(貞敏)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