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의령(宜寧). 할아버지는 풍저창부사(豐儲倉副使)를 지낸 남익저(南益㫝)이며, 아버지는 지영광군사(知靈光郡事)를 지낸 남천로(南天路)이다.
1368년(공민왕 17)에 현량과에 급제한 뒤 여러 관직을 거쳐 참지문하부사(參知門下府事)에 이르렀다.
정몽주(鄭夢周)·길재(吉再)와 교유가 있었으며, 고려 말에 정치가 문란하여지자 양주(楊州)의 사천현(沙川縣) 봉황산(鳳凰山)에 은거하였다.
조선이 개국된 뒤 태조가 사천백(沙川伯)에 봉하고 회유하였으나, ‘신하된 자로서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 하여 적성(積城)의 감악산(紺嶽山) 석굴에 들어가 은거하였다. 죽은 뒤 그 석굴을 남선굴(南仙窟)이라 하였으며, 영조 때 사천서원에 제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