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국대장공주 ()

개풍 고려 공민왕릉 좌측면
개풍 고려 공민왕릉 좌측면
고려시대사
인물
고려후기 제31대 공민왕의 왕비.
이칭
이칭
승의공주(承懿公主), 인덕공명자예선안왕태후(仁德恭明慈睿宣安王太后), 휘의노국대장공주(徽懿魯國大長公主), 인덕공명자예선안휘의노국대장공주(仁德恭明慈睿宣安徽懿魯國大長公主), 인덕태후(仁德太后), 인덕왕후(仁德王后)
인물/전통 인물
성별
여성
출생 연도
미상
사망 연도
1365년(공민왕 14)
출생지
내용 요약

노국대장공주는 고려후기 제31대 공민왕의 왕비이다. 출생일은 미상이며 1365년(공민왕 14)에 사망했다. 원나라 공주로 이름은 보탑실리이다. 12세의 나이에 원에서 숙위생활을 하던 공민왕과 혼인하여 승의공주로 책봉되었다. 노국대장공주라는 이름은 사후에 원에서 내린 시호의 약칭이다. 성품이 조용하고 단아했으며 15년 동안 고려 왕비로 있으면서 공민왕의 후비로서 책무를 다했다. 국내 기반이 미약한 공민왕의 정치운영을 지지하고 조일신의 난이나 흥왕사의 난 때 온몸으로 맞서 공민왕의 목숨을 지켜냈다. 1365년 2월 난산으로 사망하였다.

정의
고려후기 제31대 공민왕의 왕비.
생애

노국대장공주(魯國大長公主)는 원나라 공주로, 이름은 보탑실리(寶塔失里)이다. 그의 아버지에 대해서 『신원사(新元史)』에는 충숙왕의 계비인 조국장공주(曹國長公主)의 아버지인 위왕(魏王) 아목가(阿木哥)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원사』에 아목가는 1324년(충숙왕 11)에 사망하였기 때문에 노국대장공주는 아목가의 아들인 패라첩목아(孛羅帖木兒)의 딸로 보는 것이 옳다. 조국장공주와 노국대장공주는 고모와 조카 사이다.

공민왕은 1341년(충혜왕 복위 2) 12세의 나이로 원에서 숙위생활을 하였다. 공주는 1349년(충정왕 1)에 공민왕과 혼인하여 승의공주(承懿公主)로 책봉되었다. 공민왕이 즉위하자 함께 고려로 돌아왔으며, 부를 설치하여 숙옹부(肅雍府)라 하였다. 1365년(공민왕 14) 2월에 난산(難産)으로 사망하였다.

활동사항

노국대장공주는 성품이 조용하고 단아하였으며, 15년 동안 고려왕비로 있으면서 공민왕의 후비로서의 책무를 다하였다. 1353년(공민왕 2) 8월에 원에서 기황후의 어머니인 영안왕대부인(榮安王大夫人)을 위해 보르차[孛兒札]연을 베풀 때 공주는 원에서 온 만만태자(巒巒太子)와 함께 남쪽을 향해 앉고, 왕은 서쪽에, 이씨는 동쪽에 앉았다. 이는 당시 노국대장공주의 위상을 반영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주는 국내기반이 미약한 공민왕의 정치운영을 지지하고 때로는 목숨까지 지켜준 존재였다.

1352년(공민왕 1) 9월 주1 수종공신(隨從功臣) 조일신(趙日新)이 난을 일으켰다. 이 때 공민왕을 시해한 자들이 모두 조일신 세력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공민왕은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이것은 부원세력인 조일신에 맞서 노국대장공주가 공민왕을 지켰기 때문이었다. 노국대장공주의 이러한 정황은 흥왕사의 난 때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1363년(공민왕 12) 연저 수종공신인 김용 등은 행궁인 흥왕사로 침입하여 원 황제의 명령을 받고 들어왔다고 하여 침전에 들어가 공민왕을 시해하고자 하였다. 이때 노국대장공주는 공민왕을 온 몸으로 맞서 지켜냈다. 이색(李穡)은 이 상황에 대해 ‘노국공주가 문 앞에서 공민왕을 지키려고 앉아 있었다. 적들이 그 앞에서 칼을 빼들고 덤벼드는 위태로운 상황에서도 감히 공주에게는 독기를 부리지 못했으므로 장상(將相)이 그 틈을 이용하여 김용 일파를 제거할 수 있었다.’고 하였다.

한편 노국대장공주는 후사를 얻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1353년(공민왕 2) 4월과 9월에는 복령사(福靈寺)에 행차하여 후사를 빌었으며, 7월에는 왕과 공주가 함께 내정(內庭)에서 견우성과 직녀성에 제사를 지냈다. 또 같은 해에 태조의 증조비인 정화왕후(貞和王后)가 출생한 곳인 흥성사(興聖寺)에 가서 공주가 직접 공덕주가 되어 불사에 힘쓰는 한편 후사를 기원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노국대장공주가 임신을 하지 못하자 대신들은 왕을 위한 후궁을 둘 것을 공주에게 건의하였다. 공주는 이를 허락하였고, 이 때 후궁으로 들어온 이가 이제현의 딸 혜비(惠妃)이다. 그러나 공주는 곧 후회하여 음식을 먹지 않고 투기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노력 끝에 공주는 임신을 하게 되고 1365년(공민왕 14) 2월에 출산에 들어갔다. 공민왕은 공주의 출산일이 다가오자 2죄(참형과 교형) 이하를 사면하였다. 그러나 난산으로 공주의 병이 심해지자 사찰과 신사에 빌게 하였고 1죄(참형)까지 사면하였으며, 왕은 스스로 분향하고 잠시도 공주 옆을 떠나지 않았다. 그렇지만 공주는 난산 끝에 아이와 함께 사망하였다.

상훈과 추모

노국대장공주가 사망하자 공민왕은 충렬왕제국대장공주의 예에 의거하여 장례를 성대하게 거행하였다. 4도감 13색(色)을 설치하여 초상 치르는 일을 맡게 하였으며, 7일마다 추천도량을 개설, 49일째 되는 날 정릉(正陵)에 장사지냈다. 1366년(공민왕 15)에 영전(影殿)인 인덕전(仁熙殿)을 조성하고, 1370년(공민왕 19)에 수릉호(守陵戶)를 두고 원찰로 광암사(光岩寺)를 지정하였다.

공주의 시호는 처음에는 ‘인덕공명자예선안왕태후(仁德恭明慈睿宣安王太后)’이었으나 1367년(공민왕 16)에 원나라에서 ‘휘의노국대장공주(徽懿魯國大長公主)’를 내렸다, 결국 이를 합성해 ‘인덕공명자예선안휘의노국대장공주(仁德恭明慈睿宣安徽懿魯國大長公主)’로 했다. 우왕 때는 ‘인덕태후(仁德太后)’라 했다. 올바른 호칭은 아니지만 이 때문에 노국공주는 인덕왕후(仁德王后)로도 알려져 있다.

참고문헌

『고려사(高麗史)』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고려시대의 후비(后妃)』(정용숙, 민음사 1992)
「고려후기 왕실혼과 공민왕대 후비 책봉의 의미」(한정수, 『한국사연구』 165, 한국사연구회, 2014)
「고려시대 수륙재의 전개와 공민왕대 국행수륙재(國行水陸齋) 설행의 의미」(강호선, 『불교연구』 38, 한국불교연구원, 2013)
「노국대장공주와 공민왕의 정치」(이형우, 『한국인물사연구』 12, 한국인물사연구소, 2009)
주석
주1

고려 임금이 원(元)나라의 서울인 연경(燕京)에 머물던 저택. 특히 대부분의 생애를 원나라에서 보낸 충선왕(忠宣王)이 거처했음. 충선왕이 설치한 만권당(萬卷堂)도 연저의 내부에 있었음.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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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필자
김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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