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각(樓閣)과 정자(亭子)를 함께 일컫는 명칭으로서 정루(亭樓)라고도 한다.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신증동국여지승람』 누정조에서 보는 바와 같이, 누(樓) · 정(亭) · 당(堂) · 대(臺) · 각(閣) · 헌(軒) 등을 일컫는 개념으로 사용되고 있다.
누각은 누관(樓觀)이라고도 하며, 대개 높은 언덕이나 돌 혹은 흙으로 쌓아올린 대 위에 세우기 때문에 대각(臺閣) 또는 누대(樓臺)라고도 한다. 예를 들어 강릉의 경포대(鏡浦臺), 평창의 청심대(淸心臺)는 그곳의 대 자체만을 뜻한 것이 아니라 거기에 건립된 누정까지를 가리킨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대’라는 누정명(樓亭名)이 적혀 있지 않음은 이와 같은 이유 때문이다.
누각에 비하여 정자는 작은 건물로서, 역시 벽이 없고 기둥과 지붕만으로 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놀거나 휴식할 장소로서 산수 좋은 높은 곳에 세우는데 정각(亭閣) 또는 정사(亭榭)라고도 한다. 사(榭) 또한 높은 언덕, 혹은 대 위에 건립한 집으로 정자를 달리 이르는 말이다.
따라서, 누정은 가족과 함께 살아가는 마을 속의 살림집과 달리, 자연을 배경으로 한 남성위주의 유람이나 휴식공간으로 가옥 외에 특별히 지은 건물이라고 할 수 있다. 원래, 방이 없이 마루만 있고 사방이 두루 보이도록 막힘이 없이 탁 트였으며, 아름다운 경관을 조망할 수 있도록 높은 곳에 건립한 것이 특색이다.
누정은 또한 정자라는 점에서 충청남도 이남에 많이 분포한 모정(茅亭)과 비슷하지만, 모정은 주로 농경지를 배경으로 한 정자로서, 편액이나 현판은 물론 자체의 고유한 명칭이 없이 주로 농군들의 휴식소로 간편하게 지은 집이라는 점이 누정과 다르다.
한편, 누정 중에는 한두 칸 정도의 방이 있는 경우도 있다. 광주(光州)의 환벽당(環碧堂)과 같이 ‘―당’ 이라고 하는 건물에서 흔히 볼 수 있듯이, 누정의 기능이 다양화되면서 강학소(講學所)나 재실(齋室)의 기능을 하는 방을 둔 누정도 생겨나게 되었다. 그렇지만, 이 역시 방보다는 마루를 위주로 한 구조로서 누정의 특색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누정이라 하면 이와 같은 건물까지도 일컫는 개념으로 통용된다.
인류가 주거용의 가옥을 가지기 시작한 때부터 휴식공간으로 누정과 같은 건물이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중국의 『사기』에는 신선들이 누에서 살기를 좋아하였으므로 황제는 오성십이루(五城十二樓)를 짓고 신인이 오기를 기다렸다는 기록이 있는데, 비록 설화적인 전승이지만 누의 역사가 오래되었음을 말하여준다.
또한, 오나라의 왕 합려(闔閭)가 백문루(白門樓)를 짓고, 범려(范蠡)가 구천(句踐)을 위하여 비익루(飛翼樓)를 세웠다는 기록도 같은 의미로 해석된다.
우리나라의 누정은 신라의 소지왕이 488년 정월에 천천정(天泉亭)에 행차하였다는 『삼국유사』의 기록에서 처음 보인다. 여기에서 서출지(書出池)의 지명설화로 미루어 천천정은 연못을 갖춘 정자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구전(口傳)에 의하면 삼한시대에 춘천의 소양정(昭陽亭) 자리에 이요루(二樂樓)가 있었다고 한다.
또, 『삼국사기』에서는 고구려의 유리왕이 즉위 3년(서기전 17)에 계비인 화희(禾姬)와 치희(雉姬)를 별거시키기 위하여 동서에 두 별궁을 축조하였고, 백제의 진사왕은 391년에 궁전을 중수하여 못을 파고 그곳에 산을 쌓는 역사(役事)를 행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러한 기록에 의하여 볼 때 천천정 이전에 이미 누정의 축조가 이루어졌을 것으로 추측되나, 옛 기록이 확실하지 못하여 5세기 이전의 우리나라 누정의 역사는 알기 어렵다.
그러나 백제의 동성왕은 500년에 궁 동쪽에 임류각(臨流閣)을 세우고 못을 파서 기이한 짐승을 길렀으며, 무왕도 634년에 궁 남쪽에 못을 파고 방장(方丈)의 선도(仙島)를 만들었으며, 636년에는 망해루(望海樓)에서 군신들에게 잔치를 베풀었다고 한다.
이와 같이, 누정은 궁실을 위한 원림(園林)의 조성과 군신 간의 유휴처로서 조영되기 시작하여 후대에 사대부들이 풍류를 즐기는 장소로 발전하게 된 것이다.
누정은 산수 좋은 곳에 자리잡고 있는 게 특징이라 할 수 있는데, 구체적으로는 대개 다음과 같은 네 가지를 들 수 있다.
첫째, 누정은 경관이 좋은 산이나 대, 또는 언덕 위에 위치하여 산을 등지고 앞을 조망할 수 있게 되어 있다. 삼척의 죽서루(竹西樓)나 간성의 만경루(萬景樓)와 같이 전망대로서 산꼭대기나 절벽 위에 축조한 누정도 적지 않다.
옛 기록에는 이같은 누정을 흔히 천인단애(千仞斷崖), 또는 수십길의 벼랑 위에 세운 건물이라 하여 그 경치를 찬양하여 왔다. 그러나 산 위에 세워진 누정은 산기슭 등 작은 구릉 위에 있는 것이 더 흔하다.
둘째, 냇가나 강가 또는 호수나 바다 등에 임하여 누정이 세워져 있다. 산이나 언덕이 있으면 그에 따라 물이 흐르는 산곡 또는 호수가 있게 마련이므로, 산에 세워진 누정은 대부분이 물가에 임하여 있다.
그 명칭에 천(川) · 계(溪) · 강(江) · 유(流) · 호(湖) · 폭(瀑) · 해(海) · 파(波) 등이 있는 것은 바로 누정의 위치가 이처럼 임수(臨水)를 주로 하였기 때문이다.
정철(鄭澈)의 송강정(松江亭)을 비롯하여 임억령(林億齡)의 식영정(息影亭), 김윤제(金允悌)의 환벽당, 전신민(全新民)의 독수정(獨守亭), 김덕령(金德齡)의 후손이 지은 취가정(醉歌亭) 등이 모두 광주(光州)와 담양을 경계로 하여 흐르는 증암천의 냇가 구릉에 있음은 이러한 누정 위치의 특색을 알 수 있는 좋은 예이다.
특히, 우리나라의 국토는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기 때문에 바닷가에는 누정이 많다. 빼어난 경치의 산세를 끼고 동해에 접한 관동지방에 유명한 누정이 집중되어 있는데, 평해의 망양정(望洋亭), 통천의 총석정(叢石亭)은 동해에 임한 이름 있는 누정이다.
조선시대의 정국공신(靖國功臣)인 채수(蔡壽)는 “우리나라를 봉래방장(蓬萊方丈)과 같은 산수 좋은 신선의 고장이라 하는데, 그 중에서 관동이 제일이며, 이곳의 누대를 백으로 헤아리지만 망양정이 으뜸이라.”고 극찬하였는데, 이는 망양정이 이름 그대로 바다를 전망할 수 있는 승지(勝地)에 위치한 정자이기 때문이다.
셋째, 궁실의 후원 등 원림에 많은 누정이 건립되어 있다. 서울 창덕궁의 후원에는 누나 당을 제외한 이름 있는 정자만도 17동이나 된다. 예로부터 궁실의 사치는 누정의 건립으로 인한 것이 많았는데, 이 역시 궁원의 조경을 통하여 좋은 원림을 이루고자 한 뜻에서 말미암은 것이다.
궁실 외에 민간인의 원림에도 누정은 반드시 갖추어져 있다. 조선 중종 때에 양산보(梁山甫)가 경영하였던 담양의 소쇄원(瀟灑園) 경내에는 광풍각(光風閣)과 제월당(霽月堂)이 아직도 남아 있으며, 윤선도(尹善道)는 보길도(甫吉島)에 세연정(洗然亭)을 비롯하여 호광루(呼光樓) · 회수당(回水堂) · 정성당(靜成堂) 등 열두 정자를 짓고 부용동(芙蓉洞) 원림을 경영하였다는데, 이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민간정원으로 알려져 있다.
넷째, 변방 또는 각지의 성터에도 누정이 많이 건립되었다. 주로 병사(兵舍)로 쓰기 위하여 지은 건물이므로 그 성격은 특이하지만, 산수의 지형이 고려된 것이므로 그 위치의 경관은 일반 누정과 크게 다를 바 없다.
오랑캐를 평정하기 위하여 함경도의 삼수에 지었다는 진융루(鎭戎樓)의 경치가 매우 좋았다는 것도 바로 이러한 사실을 잘 말하여 준다.
그리고 옛날 주요고을에는 문루(門樓)를 두었는데, 주로 객사의 부속으로, 혹은 성문의 한 형태로 지은 것이다. 으레 높은 곳에 위치하여 평상시 그곳에 오르면 일반누정에서의 감회를 그대로 느끼게 된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누정은 대부분 배산임수(背山臨水)에 위치한 것이 그 특징이다. 특히, 누정의 위치는 물과 불가분의 관계가 있어 어떤 누정이든 그 주변에 못이 있는 예를 흔히 볼 수 있는데, 남원의 광한루(廣寒樓)와 함흥의 칠보정(七寶亭)은 못 위에 세운 누정으로서 널리 알려져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소개된 전국 누정의 수는 모두 553동이다. 그러나 국역본에는 『신증문헌비고』 · 『대동지지』 · 『동국여지비고』 등의 기록을 참고하여 885동으로 하고 있다. 이를 분류하여 보면 누는 416동, 정은 365동, 당은 45동, 나머지는 대 · 헌 · 각 · 관 · 기타 등으로 누가 가장 많다.
누는 정자와는 달리 성문 혹은 성루로 세워지기도 하고 객사 등 관아의 부속으로 건립된 경우가 많아, 옛 문헌에 의거하여볼 때 우리나라의 누정에는 누가 가장 많은 것으로 나타난다. 1977년 발행된 『문화유적총람』에는 모두 548동의 누정 가운데 정자가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어 우리나라의 누정은 정자 위주임을 입증하고 있다.
그러나 전국 각 지방의 누정을 재조사하여 보면 그 수는 훨씬 많을 것으로 추측된다. 전남대학교 호남문화연구소에서 1985년 이후 계속하여 실시한 전남지역의 누정 조사연구에 의하면 위에 든 문헌에 있는 누정 외에 새롭게 발견된 건물이 상상 외로 많기 때문이다.
따라서, 전국적인 누정의 집계를 정확하게 제시하기는 아직은 빠르지만, 문헌에 의하여 지역적인 분포는 짐작할 수 있다.
먼저 이에 소개된 지역별 누정수를 보면 〈표 1〉과 같다.
① 국역 신증동국여지승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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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명 | 경도 | 한성부 | 개성부 | 경기도 | 충청도 | 경상도 | 전라도 | 황해도 | 강원도 | 함경도 | 평안도 | 합계 |
누정 수 | 14 | 24 | 13 | 34 | 80 | 263 | 170 | 50 | 81 | 56 | 100 | 885 |
② 문화유적총람 | ||||||||||||
지역명 | 서울 | 경기 | 강원 | 충북 | 충남 | 부산 | 경북 | 경남 | 전북 | 전남 | 제주 | 합계 |
누정 수 | 43 | 45 | 50 | 38 | 19 | 4 | 173 | 98 | 13 | 83 | 3 | 609 |
〈표 1〉 각 도의 누정 수 |
이 표를 볼 때 우리나라의 누정은 경상북도에 가장 많이 분포되어 있고 그 다음이 경상남도이며, 전라남도 지방도 다른 지역에 비하여 그 수가 적지 않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여 다시 각 지방의 누정 분포를 보면, 함경도는 함흥 · 갑산 · 삼수 · 추성 · 안변 등에 많고, 평안도는 평양 · 영변 · 안주 · 정주 등에, 황해도는 황주 · 해주 등에, 강원도는 강릉 · 평해 · 원주 · 양양 등에, 경기도는 광주에, 충청도는 충주 · 공주 · 보령 등에, 경상도는 경주 · 안동 · 거제 · 영해 · 상주 · 구미 등에, 전라도는 전주 · 남원 · 순창 · 광산 · 화순 등에 누정이 많은 편이다.
그러나 『문화유적총람』에 소개된 누정의 분포는 각 도지(道誌) 등 현지에서 발행된 문헌을 위주로 한 집계이므로 다소 차이가 난다. 여기에서는 누와 각으로 분류하여 집계하였는데, 누보다 정자의 조사가 비교적 자세하다. 참고로, 누정이 10동 이상 집계된 고을을 보면 〈표 2〉와 같다.
고을 이름 |
서울 | 인천 | 광주 | 강원 | 충북 | 경북 | 경남 | 전북 | 전남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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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로 | 강화 | 광산 | 강릉 | 영동 | 경주 | 안동 | 영일 | 영주 | 봉화 | 함안 | 거창 | 합천 | 정읍 | 담양 | 보성 | |
누정 수 | 32 | 20 | 14 | 14 | 10 | 21 | 41 | 12 | 22 | 16 | 13 | 19 | 14 | 18 | 10 | 10 |
〈표 2〉 누정이 10동 이상인 곳 | ||||||||||||||||
*자료: 문화유적총람 |
위에 든 몇 가지의 집계를 종합하여 보면 우리나라의 누정은 역시 경상도에 제일 많고, 그 다음이 전라도이다. 그리고 누정은 주로 강가의 구릉이나 해변의 산기슭에 위치하므로, 낙동강 주변을 비롯하여 영산강 · 섬진강 · 금강 · 임진강 · 한강 · 소양강 · 대동강 · 청천강 등과 관동지방의 동해연변에 많이 건립되었음을 알 수 있다.
누정의 명칭이 생기게 된 유래는 건물마다 다르다. 같은 명칭의 누정이라 하더라도 그렇게 명명된 계기는 가지각색이다. 그러나 누정의 명칭으로 미루어보아 유래는 다음의 몇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1.1. 부근의 자연과 관련된 명칭 : 첫째, 산수와의 관련에 의하여 붙여진 명칭이 많다. 산에 있는 누정은 대개 산의 지형, 또는 바위나 절벽 등과 관련된 이름이 많다.
예를 들면, 영월의 요선정(邀仙亭)은 요선암 위에 세워졌기 때문에, 남원의 용두정(龍頭亭)은 용머리와 같은 기암 위에 있기 때문에, 그리고 구례의 봉성산 밑에 있었다는 봉서루(鳳棲樓)는 그 고을의 지형이 봉과 같다고 하여 생긴 이름이다.
물가나 물 위에 있는 누정명은 내와 호수 · 바다 · 못 등과 관계가 있다. 영월의 금강정(錦江亭), 강릉의 송파정(松波亭), 영동의 금호루(錦湖樓), 태안의 망해루(望海樓) 등은 각각 금강과 송현의 저수지, 그리고 금강에 있는 금호와 멀리 바라보이는 서해 등에서 연유된 이름이다. 이와같이 통계상으로 볼 때 누정명은 물과 관계된 것이 가장 흔하다.
둘째, 자연의 풍월 · 구름 · 비 등에서 연유된 이름이 많다. 서울 종로의 상량정(上涼亭)은 예로부터 여름의 삼복에 납량을 즐겼던 곳이며, 희우정(喜雨亭)은 가뭄에 비오기를 빌다가 단비를 맞고 그와 같이 이름을 붙였다고 전한다.
저녁에 떠오르는 아름다운 달을 맞이한다는 광주(廣州)의 영월루(迎月樓), 구름을 즐긴다는 뜻의 이천의 열운정(悅雲亭) 등도 모두 같은 예에 속한다.
셋째, 동식물과 연관된 이름이 많다. 영월의 자규루(子規樓)는 원래의 이름은 매죽루(梅竹樓)인데, 단종이 영월로 유배될 때 이 누에 올라 슬피 우는 자규 소리를 자주 듣고 자규시를 읊었다고 하여 고쳐 붙인 이름이며, 진도의 동백정(冬柏亭)은 동백이 수백그루 있는 곳에 세웠기 때문에 생긴 이름이다.
동물류로는 봉황 · 용 · 거북 등 상상의 동물과 학 · 갈매기 등이, 식물류로는 흔히 군자로 상징되는 매화 · 난초 · 국화 · 대나무 · 연꽃 · 소나무 등이 누정의 이름으로 많이 쓰였다.
넷째, 위의 세 가지 경우와는 달리 어느 한 자연물만을 염두에 두지 않고 자연을 대할 때의 포괄적인 감상의 흥취로 생긴 누정명도 있다. 간성의 만경루나, 망선루(望仙樓)를 개명한 청주의 취경루(聚景樓) 등이 바로 이러한 경우이다.
1.2. 인물의 호칭과 관련된 명칭 : 첫째, 성명이나 별호와 관계된 명칭이 있다. 양양의 하조대(河趙臺)는 이곳의 절승을 탐승하던 하륜(河崙)과 조준(趙浚)의 성에서 따온 호칭으로 전한다. 또, 달성의 삼가헌(三可軒)을 비롯하여, 괴산의 애한정(愛閑亭)과 피세정(避世亭), 그리고 담양의 면앙정(俛仰亭)과 송강정 등은 각각 박성수(朴聖洙) · 박지겸(朴智謙) · 조신(曺紳) · 송순(宋純) · 정철 등의 호를 따서 붙인 명칭이다.
누정에는 이처럼 사람의 호와 같은 명칭이 많은데, 후손들이 선조를 위하여 지은 정자는 대개 선조의 호로써 그 이름을 삼았다. 삼가헌 · 애한정 · 피세정이 이에 속한다. 그러나 누정명이 바로 이를 건립한 사람의 호로 알려진 경우도 적지 않은데 송강정과 면앙정이 이에 해당된다.
둘째, 다수의 모임으로 된 계(契)나 회에서 건립한 정자가 있다. 이때의 누정명은 대개 그 모임의 이름과 같다. 강릉의 금란정(金蘭亭) · 취영정(聚瀛亭), 정읍의 백학정(白鶴亭) · 난국정(蘭菊亭) 등은 모두 이러한 모임의 명칭으로 된 누정명이다.
1.3. 한문 구절이나 고사에서 유래된 명칭 : 누정의 명칭은 모두 한자로 된 것이기 때문에 거기에는 한자어로서의 뜻이 있다. 그중에는 한문구에서 직접 따온 누정명이 있다.
고려 말 전신민의 은둔처로 알려진 담양의 독수정은 “이제시하인독수서산아(夷齊是何人獨守西山餓)” 라는 이백(李白)의 시에서 따온 것이며, 서울 성동에 있었다는 화양정(華陽亭)은 “귀마우화산지양(歸馬于華山之陽)”이라 한 『주서(周書)』의 글에서 말미암은 것이다. 청원의 월송정(月松亭), 제천의 탁사정(濯斯亭), 부여의 대재각(大哉閣) 등도 이와 같은 예에 속하는 누정이다.
그 밖에 고사 등 옛이야기에서 연유된 누정명도 있다. 담양의 식영정은 임억령이 장주(莊周)의 외영오적(畏影惡迹)의 이야기에 착안하여 붙인 것이며, 제주도의 삼도, 전라남도의 함평, 서울 종로에 건립되었던 관덕정(觀德亭)은 모두 『예기』 사의편(射義篇)에 “사(射)는 덕을 보는 것”이라고 한 글에서 취한 이름이다. 따라서, 관덕정은 원래 활을 쏘는 곳으로 쓰고자 하여 건립한 누정임을 알 수 있다.
누정에 얽힌 고사는 주로 중국의 옛이야기이지만, 우리나라의 이야기에서 붙여진 명칭도 있다. 조선조에 효종은 북벌계획이 무너지자, 그것을 한탄하여 ‘일모도원(日暮途遠)’이라 하며 탄식하였다 하는데, 송시열(宋時烈)은 이와 같은 이야기에서 괴산 모원루(暮遠樓)의 이름을 지었다 한다.
또, 서울 종로의 세검정(洗劍亭)은 인조반정 때에 김류(金瑬) · 이귀(李貴) 등이 광해군의 폐위를 의논하고 칼을 씻어 칼집에 넣었다는 이야기와 관계되어 전하는 것으로 보면, 누정의 이름에는 국내의 산문 · 전승과 관련된 것이 적지않음을 알 수 있다.
누정의 편액은 크게 두 가지로 구별된다. 하나는 누정의 명칭이 새겨진 것이며, 또 하나는 누정기(樓亭記) 또는 이곳에서 지은 누정제영(樓亭題詠)을 현판한 것 등이다. 대부분의 누정은 이와 같은 편액을 갖추고 있는데, 누정이 다른 건물과 구별되는 점은 바로 이 때문이다. 앞에 든 두가지 중, 앞의 것은 주로 세 글자로 되어 있기 때문에 3자횡서(三字橫書)로 새겨 누정 밖에 걸어놓고 있다.
이에 대하여 누정기는 비교적 긴 한문장(漢文章)이며, 누정제영도 5언 또는 7언의 한시로서, 이들은 모두 종서(縱書)로 새겨 누정 안에 걸어놓고 있다. 다만, 누정시만은 경복궁의 부용정(芙蓉亭)이나 청심정(淸心亭)에서 보는 바와 같이 주련(柱聯: 기둥에 장식으로 써붙인 글귀)에 씌어 밖의 기둥에 걸려 있기도 한다.
한편, 누정명의 편액은 임금의 하사나 유명인사의 명명으로 된 것이 유명하다. 성종의 사액으로 된 서울 종로의 풍월정(風月亭), 숙종의 사액으로 된 희우정은 물론, 정조의 어필로 된 주합루(宙合樓) 등이 그 일례이다.
영일에 있는 화수정(花樹亭)의 편액은 김정희(金正喜)의 글씨이고, 영주의 구학정(龜鶴亭)과 의성의 만취당(晩翠堂)은 한호(韓濩)가, 강릉의 해운정(海雲亭)은 송시열이 그 편액을 썼다고 하여 더욱 이름나 있다.
특히, 중국인의 글씨를 중요시하여, 서울 도봉산의 봉황각(鳳凰閣)은 중국의 명필 안진경(顔眞卿)의 글씨에서 ‘봉(鳳)’자를 채자(採字)하였으며, ‘황(凰)’자 역시 중국 명필의 글씨에서 채자한 것이다. 앞에 든 해운정에는 또 ‘해운소정(海雲小亭)’이라 한 편액이 걸려 있는데, 이는 명나라의 사신 오희맹이 쓴 것이다.
정자에 따라서는 때로 다른 이름의 편액이 있는 경우도 있다. 정철이 담양에 세웠다는 송강정은 죽록정(竹綠亭)이라 한 편액이 아울러 현판되어 있는데, 이것은 송강정 아래 죽록평야를 끼고 흐르는 송강을 죽록천이라고도 부른 데서 생긴 이명이다. 누정 내에 현판된 누정기나 누정시 역시 주로 당시의 이름 있는 누정시인의 참여로 이루어졌으며, 편액의 글씨체는 해서 · 초서 · 예서 · 전서 등으로 다양하다. 글자수가 적은 누정의 이름은 초서 · 예서 · 전서 등으로 쓰인 것이 많고, 글자수가 많은 누정기나 누정시는 해서 또는 반초서로 쓰인 것이 많다. 이 편액은 나무판에 새긴 것이 특색인데, 오목새김[陰刻]보다는 돋을새김[陽刻]으로 된 현판이 주를 이루며, 검은 판에 흰 글씨로 돋보이게 돋을새김한 현판이 일반적이다.
세워진 위치나 이를 건립한 취지에 따라 그 기능이 다양하다. 첫째, 누정은 유흥상경(遊興賞景)의 기능을 가졌다. 누정의 명칭에 자연의 산수로 말미암아 명명된 누정이 가장 많다는 것은 이와 같은 누정의 기능을 시사하여 준다. 흔히 명승지를 유람하고자 하여 누정에 오르고, 누정에 오르면 산수의 아름다움을 감상하게 됨은 누정의 기능이 바로 유흥상경에 있음을 의미한다.
특히 시인묵객들은 물론 사신에 이르기까지 뜻 있는 길손들이 많이 오르내리던 곳이므로, 이에서 유흥이 나오고 누정경관을 즐기는 흥취가 생겨날 것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이런 뜻에서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는 중종 때의 여러 신하들이 유하정(流霞亭)과 같은 승지의 정자를 찾아 구경하고 이를 노는 장소로 삼았다고 하였고, 안노생(安魯生)은 징심루(澄心樓)의 기문(記文)에서 “무릇 누관을 짓되 유람하며 상경하는 즐거움으로 하지 않음이 없다.”고 지적한 바 있다.
둘째, 누정은 시단(詩壇)을 이루는 기능을 하였다. 시를 아는 선비들이 누정을 짓고 이를 휴식처로 삼아 거기에서 유유자적할 때 찾아오는 이는 물론 뜻이 통하는 시우(詩友)들이다. 유흥상경의 흥치가 시적으로 나타나면 그것은 곧 누정시가 되었으니, 누정시단은 이렇게 해서 형성되었다.
흔히 면앙정시단이니 식영정시단이니 함은 면앙정이나 식영정에서 누정제영을 읊으며 시작활동을 하던 시적 교유의 집단을 말한다. 식영정에서는 임억령을 중심으로 한 김성원(金成遠) · 고경명(高敬命) · 정철 등 성산(星山)의 사선(四仙)이 호운작시(呼韻作詩)하며 시적 사귐을 가졌는데, 이들은 식영정시단의 대표적인 인물이다.
셋째, 누정은 학문으로 수양하고 강학(講學)하며 인륜의 도를 가르치던 구실을 하였다. 누정에는 사대부들이 벼슬을 그만두고 은퇴하여 유휴처로서 지내던 곳이 많다. 광해군 때의 처사(處士) 오유립(吳裕立)이 청원에 월송정과 지선정(止善亭)을 짓고, 그곳에 은거하면서 유생을 가르쳐 많은 문사를 배출하였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누정은 결국 강학하던 장소가 되고, 또 인간의 규범을 깨우치던 정사(精舍)의 구실을 겸하였다고 볼 수 있다.
넷째, 누정에서는 씨족끼리의 종회(宗會)나 마을사람들의 동회(洞會) 또는 각종 계의 모임을 가지기도 하였다. 그래서 누정에는 종친들의 합의에 의하여 또는 마을공동으로, 혹은 계의 모임에서 건립한 것이 적지않다. 청풍김씨의 종중에서 세운 괴산의 모선정(慕先亭), 선조 때의 동중계약(洞中契約)부터 보존하여 오고 있는 나주의 쌍계정(雙溪亭) 등은 건립취지에 따라 종회나 계회 또는 동회가 개최되었던 곳이다.
근대에 와서 누정이 지역사회의 공동사랑방 구실을 겸하게 되었다고 하는 것은 누정이 동회 따위의 모임을 열기에 편리한 곳이었기 때문이다.
다섯째, 누정 중에는 활쏘기의 수련장, 즉 사장(射場)의 구실을 하던 곳이 많다. 앞에서 말하였듯이 관덕정은 모두 궁술 연마를 위하여 건립한 누정이다. 서울의 다섯 사장이었던 옥동의 등룡정(登龍亭), 삼청동의 운룡정(雲龍亭), 사직동의 대송정(大松亭), 누상동의 풍소정(風嘯亭), 필운동의 등과정(登科亭)은 모두 궁술 연습장으로 이름난 곳이었다. 그 밖에 전국 도처에서 활쏘기를 연습하던 정자를 발견할 수 있는 것으로 보아 누정이 사장의 기능을 가지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여섯째, 누정은 한 고을의 문루(門樓) 또는 그곳의 치적을 표상하는 것으로도 건립되었다. 옛날에는 고을을 지키기 위하여 성을 쌓으면 으레 성루(城樓)를 두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함흥부의 누정조에, 남쪽의 남화루(南華樓), 북쪽의 망양루(望洋樓) 등 열두 성루가 있었다고 하는데, 이는 모두 성의 기능을 가진 누정들이다. 변방을 지키기 위하여 세웠던 삼수의 진융루, 은성의 진변루(鎭邊樓), 의주의 통군정(統軍亭)도 성루의 하나이다.
고을에 따라서는 북청의 진남루(鎭南樓), 평양의 대동문루(大同門樓) 등과 같이 동서남북에 문루가 있었던 경우도 있다. 그리고 승지를 가려 오고가는 벼슬아치들의 접대소 또는 휴식소로서 객관(客館)에 따른 누정을 짓기도 하였다. 큰 고을이나 치적을 자랑하는 지방에서는 이와 같은 누정의 사치가 적지 않았다.
누정의 기능은 위에 든 여섯 가지 외에 별장(別莊), 전쟁 때의 지휘본부, 재실(齋室) · 치농(治農) · 측후(測候) 등 여러 가지이다. 서거정(徐居正)은 「학명루기 鶴鳴樓記」에서 누정은 나라의 사신을 정중히 맞이하고 빈객을 접대하기 위함이며, 때와 기후를 예측하고 농사를 살펴서 백성들과 함께 즐기는 뜻을 가지는 데에 그 의의가 있다고 하였다. 이것은 바로 누정의 기능이 다양함을 말하여 주는 것이다.
진주의 촉석루(矗石樓)는 전쟁 때 군민의 지휘본부가 되기도 하였으며, 영일의 권무정(勸武亭)은 무예연마장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또, 담양의 관가정(觀稼亭)은 농사의 감독을 위한 전사적(田舍的) 성격을 가지고 있었음을 볼 때 누정의 기능은 매우 다양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어느 누정이나 대부분 누정기와 누정시가 있다. 누정에 걸려 있는 현판 중, 누정명 외에는 모두 그곳의 승경(勝景)을 노래한 누정시문이다. 누정에 따라서는 감상을 위하여 유명한 시문을 새겨 현판한 곳도 있으나 이 같은 예는 흔하지 않다. 적게는 한두 편, 많게는 수백 편의 시문을 낳게 한 곳이 바로 누정이다. 1978년 진주시에서 출간한 『촉석루시집』에 의하면, 촉석루의 누정시문은 대개 5언 또는 7언으로 된 한시로서 400편이 넘는다.
누정에서 제작된 한시는 누정제영이라고 일러 왔는데, 역사가 오래되고 유명한 누정일수록 그 제영이 많다. 그러나 1918년에 세운 광주(光州)의 연파정(蓮坡亭)이나 1934년에 세운 하은정(荷隱亭)은 그 역사가 오랜 편은 아니나 여기에서도 많은 시문이 제작되었다. 연파정에서 지어진 제영은 400수가 넘는데 이는 짧은 기간에 많은 시인이 출입하였음을 뜻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의 제영조에도 많은 한시가 수록되어 있는데 대부분이 누정제영이다.
누정이 이처럼 시문의 산실이 된 까닭은 누정이 주로 경승지에 건립된데다가 주인은 대부분 시문을 즐기던 식자층으로 그 교우가 대부분이 학자요 시인이었기 때문이다. 당대의 학자이며 이름난 시인이었던 김인후(金麟厚)가 무등산 밑에 은퇴하여 지내던 소쇄원의 주인 양산보와 친하여짐으로써 그곳의 광풍각과 제월당을 소요하면서 지은 소쇄원 48영(詠)의 서경시는 이러한 시적 교유로 생긴 누정시의 대표적인 예이다.
식영정의 주인이던 임억령도 식영정 중심의 20가지 승구(勝區: 경치 좋은 구역)를 가려 이에 이름을 짓고 식영정 20영의 누정시를 남겼다. 이러한 서경시는 연작되게 마련인데, 김성원과 고경명 · 정철 등은 임억령으로부터 시를 배우며 그의 호운(呼韻)에 따라 각각 식영정 20영을 지었고, 뒤에 이곳을 찾은 시인들도 그들의 시에 차운(次韻)한 식영정시를 남겼다.
누정에서의 교유와 그 서정이 문학에 끼친 영향은 이처럼 커서, 유명인사나 유림들이 경영하던 누정에서는 누정시단이 형성되었고 거기에서 많은 시회가 이루어졌다. 이 시회의 모임은 대개 한시문을 아는 유생이 주가 되었는데, 그 한 예로 유림들이 건립한 정읍의 쌍청정(雙淸亭)에서는 해마다 2회의 글짓기 및 풍월놀이가 있었고, 명유들의 집합소로 알려진 강릉의 경호정(鏡湖亭)에서는 춘하추동에 걸쳐 시회를 가졌던 것으로 전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소개된 누정시문에 의하여 볼 때 고려조의 김극기(金克己) · 안축(安軸) · 이규보(李奎報) · 이곡(李穀) · 이첨(李詹) · 정추(鄭樞) · 정이오(鄭以吾) · 이색(李穡) 등, 조선조의 권근(權近) · 변계량(卞季良) · 김종직(金宗直) · 이승소(李承召) · 서거정 · 성임(成任) · 성현(成俔) 등이 대표적인 누정시인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들은 누정 건립 때 청에 의하여 누정기를 짓고, 또 축의로 누정시를 짓는 경우가 적지 않았지만, 뒷날 유서깊은 누정을 유람하며 회고적으로 누정에서의 상경흥취를 노래한 예가 적지않다.
그런데 누정에는 이러한 일반인의 시문만이 있는 게 아니다. 여기에 어제시(御製詩)가 많은 것도 그 한 특색이다. 그만큼 임금들도 누정 유람을 즐겼고, 또 누정시 짓기를 좋아한 것으로 이해된다.
이상에 든 한시로 된 누정시문 이외에 누정문학 중에는 시조와 가사 등 국문시가가 적지않다. 안주의 백상루(百祥樓)에서 지은 이현(李俔)의 「백상루별곡(百祥樓別曲)」과 담양의 면앙정에서 지은 송순의 「면앙정가」는 대표적인 누정시가이다.
식영정에서 쓴 정철의 「성산별곡」도 임억령의 식영정 20영의 영향으로 이루어진 가사로서, ‘식영정별곡’이라 하여도 무방한 대표적인 누정가사이다.
시인들의 기행은 으레 누정의 유람을 겸하였기 때문에 이러한 여행을 노래한 기행가사는 누정문학의 성격을 띠게 마련이었다. 백광홍(白光弘)이 서도지방에서 그곳의 정사를 보살피며 자연풍물을 편력하고 지은 「관서별곡」에는 그곳의 재송정(栽松亭) · 연광정(練光亭) · 부벽루(浮碧樓) · 풍월루 · 백상루 · 결승정(決勝亭) · 수항정(受降亭) · 통군정 등을 유람하던 흥취가 담겨 있다. 정철이 강원도관찰사가 되어 관동팔경을 유람하고 지은 「관동별곡」에는 그곳의 북관정(北關亭) · 산영루(山暎樓) · 총석정 · 백옥루(白玉樓) · 청간정(淸澗亭) · 죽서루 · 망양정 등을 구경하던 시흥이 담겨 있어, 이 두 기행가사도 누정문학의 일환으로 이해된다.
시조에도 누정에서 지은 것이 적지 않다. 단종이 영월의 자규루에 올라 지은 자규시 중에도 시조가 있으며, 송순이 면앙정에서 지은 「면앙정단가(俛仰亭短歌)」도 시조 형식의 노래이다. 장복겸(張福謙)이 고산의 불고정(不孤亭)에서 「고산별곡(孤山別曲)」 10수를, 나위소(羅緯素)는 영산강가의 수운정(岫雲亭)에서 「강호구가(江湖九歌)」 9수를 연작으로 지었는데, 이처럼 시조에도 누정시가 많았음을 알 수 있다.
누정은 결국 수많은 시인묵객들이 소요하며 출입하던 곳이므로 누정제영으로서의 한시는 물론, 가사와 시조 등 국문시가까지 지은 곳으로, 시가문학의 산실이 되었을 뿐 아니라 우리 문학을 발전시키는 데에 한몫을 하였다. 누정문학의 차원에서도 우리나라 문학사상 누정시인의 비중은 결코 가볍게 여길 수 없다. 우리문학에 특히 산수시가 많은 점을 생각할 때 누정문학의 주종이 이 산수시임을 주목하여야 할 것이다.
어떤 누정이든 이를 건립하게 된 이유가 있다. 옛날의 누정에 대한 유래담은 대개 전설적인 것이며, 그중 신선이 놀았다는 누정은 틀림없이 전설이 얽힌 건물이다. 사선의 유람처로 전하는 강릉의 한송정(寒松亭), 통천의 총석정이 대표적인 경우이다.
상상의 동물로 비유되던 봉황 · 용 · 기린 · 거북 등의 사령(四靈)의 이야기가 곁들여 있어도 전설적인 누정으로 파악된다. 예를 들어, 정자를 짓기 위하여 와룡산의 기슭을 파니 갑자기 피가 솟아나므로 용의 머리를 잘못 찍은 것으로 생각하여 애석하게 여기고 그 자리에 정성을 들여 정자를 지었다는 전언은 예천의 용두정(龍頭亭)의 유래담이다. 합천의 용문정(龍門亭)이나 남원의 용두정도 정자가 서 있는 곳이 용의 형상에 비유되므로 그렇게 이름하였고, 양평의 보산정(寶山亭)은 청룡과 황룡이 오기를 기다려 지었다는 정자이다.
누정은 이처럼 산세의 모양이나 거기에 얽힌 이야기로 이름난 곳에 건립하는 경우가 많다. 유명한 인물의 전설이 있는 곳에 누정을 세우면 그것이 곧 누정에 얽힌 전설로 전하기도 한다. 신라 최치원(崔致遠)이 발자취를 남겼다는 곳은 전국 곳곳에 전하는데, 마산의 월영대(月影臺), 함양의 학사루(學士樓), 거창의 고운정(孤雲亭), 합천의 학사대(學士臺)와 농산정(籠山亭) 등은 모두 최치원의 전설이 얽힌 누정이다.
역사적 인물과 사건에 관계된 누정의 이야기는 대개 그것이 전승되면서 전설담으로 유전된다. 누정의 유래담은 처음 사실에 근거한 것이었더라도 전승과정에서 설화화되기 때문이다.
홍건적(紅巾賊)의 침입으로 몽진(蒙塵)하여 다니던 공민왕이 난을 평정하고 문과(文科)와 감시(監試)를 행하고 방을 붙였다는 청주의 취경루, 병자호란에 피난온 태백오현(太白五賢)이 정자 옆을 흐르는 물에 누워 목욕하였다는 데서 유래된 봉화의 와선정(臥仙亭), 헌종 때에 황기익(黃基益)의 문하생인 홍철태(洪哲泰)가 스승과 함께 과시(科試)를 보았는데 자신만이 급제한 데 통한하여 스승을 위하여 지었다는 함안의 와룡정(臥龍亭), 고려 말의 권정(權定)이 고려가 망하자 벼슬을 버리고 은거하면서 지었다는 영주의 봉송대(奉松臺), 양재역벽서사건(良才驛壁書事件)으로 단양에서 귀양살이를 한 김난상(金鸞祥)을 추모하기 위하여 후손들이 지었다는 영주의 매양정(梅陽亭)의 이야기들은 모두 사실과 관계된 전언일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이 이야기들에 설화적 흥미가 전혀 가미되지 않았다고 할 수 없으므로, 이것이 전승되면서 이미 누정에 얽힌 전설로 인식되어온 것이라 할 수 있다.
설화적 흥미를 가지게 하는 누정의 이야기 몇 가지를 유형별로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경술국치로 국권이 상실되자 이를 통탄하고 임금을 그리며 북향하여 쓰러진 괴목이 3년이 지나서 되살아나므로, 나무의 충정을 상기시키고자 하여 나무 밑에 정자를 세웠다는 진안의 충목정(忠木亭)에 얽힌 전설이나, 마하산정의 바위 위에서 영월의 단종을 바라보며 흘린 김충주(金忠柱)의 눈물에 나무가 고사하므로 그곳에 세웠다는 시흥의 고송정(枯松亭)에 얽힌 설화는 나무전설의 하나이다.
이 밖에 성을 쌓는 데 한몫 하지 못하여 울었다는 돌의 전설이 얽힌 진양의 명석각(鳴石閣), 황폐된 연당(蓮塘)을 손보고 정자를 지으니 그 고을에서 인재가 배출되었다는 연당전설이 얽힌 정읍의 군자정(君子亭), 묘를 쓰면 고을의 식수가 마른다고 하여 이를 막기 위하여 정자를 세웠다는 식수전설이 얽힌 담양의 남희정(南喜亭) 등 누정과 관련있는 설화는 여러가지이다.
특히, 누정에 얽힌 전설 중 흥미 있는 것은 내화전설(耐火傳說)이다. 임진왜란 때에 ‘孝子愼義連(효자신의련)’이라고 써준 글씨를 왜적이 불태우려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던 일을 기념하여 신의련을 추모하고 지은 진안의 영모정(永慕亭), 역시 왜적이 누정을 불태우려 하였으나 타지 않았다는 영일의 만활당(萬活堂), 왜적에게 정자의 건물은 전소되었지만 그 편액만은 타지 않았다는 광산의 풍영정(風詠亭) 등은 모두 불을 이겨냈다는 흥미 있는 전설을 지니고 있다.
내화전설을 통하여 보면 과거에 일본의 침략으로 그들의 잔인한 방화가 누정에까지 미쳤던 것을 짐작하게 하고, 우리 겨레가 왜란 당시 그들을 이겨내며 정신적으로 극왜(克倭)하려 했던 염원이 얼마나 컸던가를 알 수 있다.
누정은 숫자도 많을 뿐 아니라 그 모양이나 쓰임도 다양하여 여러가지 형태로 건립되었다. 따라서, 구조평면도 단칸의 정방형으로부터 장방형 · 육각형 · 팔각형 · 십자형 · 부채꼴 등에 이르기까지 다양하였다.
경복궁의 경회루(慶會樓)를 비롯하여 밀양의 영남루, 진주의 촉석루, 삼척의 죽서루, 청풍의 한벽루 등 누마루집은 평면이 단순한 장방형이 대부분이나, 궁궐 내에 건립된 누정은 치장이나 구조가 매우 화려하며, 육각형이나 팔각형 등 복잡한 평면을 가진 것이 많다.
창덕궁 내의 존덕정(尊德亭)이나 창경궁의 상량정, 경복궁의 향원정(香遠亭) 등은 육각형의 평면을 이루고 있으며, 경복궁의 부용정은 평면이 십자형을 이루는 건물로 그 대표적인 예이다. 이 밖에도 창덕궁의 관람정(觀纜亭)은 평면이 합죽선의 부채모양을 이루고 있어 평면을 이루기 위하여 기둥 사이의 자재를 휘어서 사용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것과는 다르게 모정은 아주 질박한 것이 대부분이어서 평면이 대개 장방형을 이루고 있으나, 구례 운조루(雲鳥樓) 앞의 모정만은 예외적으로 팔각형의 평면을 이루고 있다.
한편, 구조적으로 볼 때 평면이 정방형인 누정은 그 가구(架構)에 있어서 대들보를 쓰지 않으므로, 귀접이천장을 하거나 또는 네 귀의 추녀가 정상에 모이도록 하는 구조법을 사용한다. 누정은 원래 오두막집이나 그와 비슷한 건축물에서 발전한 것이어서 비록 기와를 이은 지붕이기는 하지만, 새나 이엉을 이었을 때의 지붕처럼 네 귀를 날카롭게 하지 않고 둥글리는 것이 일반적이다. 달성의 하목정(霞鶩亭)이나 청도의 득월정(得月亭) 등에 그와 같은 방구매기법이 잘 드러나 있다.
또한, 천장 구조에 있어서 누정은 우물반자를 하지 않고 대개 연등천장으로 하고 있다. 지붕의 구조도 특별한 치장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니지만 사모정 · 육모정 · 팔각정 등에서는 가운데 모아지는 부분에 절병통을 얹어 마무리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건물의 장식은 대부분은 단청을 하지만, 향리의 누정은 백골로 두거나 긋기 정도를 하는 것으로 그치고, 기둥에는 주련을 붙이고 편액에 누정의 명칭을 써서 걸어놓고 있다.
정인지(鄭麟趾)는 함평의 관정루(觀政樓)의 기문에서 누관을 통하여 나라 다스림의 잘잘못은 물론, 한 고을의 창성과 쇠퇴의 연유를 알 수 있다고 하였다. 이는 누정의 흥성 여부에 따라 나라와 지역의 발전을 점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누정의 건립은 치적의 공적으로 평가되어 옛날에는 부사나 현감 또는 군수 등 현관(縣官)과 선비들이 이의 건립을 추진하고, 직접 누정을 유람하며 누정제영을 남기는 것을 보람으로 생각하였다.
그러나 누정문화 활동의 주역은 현관보다 퇴관한 선비나 처사로 지내던 지식인들이다. 누각에 남긴 문화적 흔적으로 보면 현관이 기여한 바도 적지 않지만, 누정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정자에 남긴 발자취로 보면 자연에 소요자적하거나 또는 이에 은둔하던 지식인들의 공이 절대적으로 크기 때문이다.
이렇게 볼 때 우리의 누정은 전근대적 사회에 있어 교양인들이 지적 활동을 폈던 곳이다. 이 시대의 교양인은 상류의 문화계층에 속한 사람들로서, 이들이 모여 풍류를 즐기며 시정을 나누고, 당면한 정론을 펴며 경세문제(經世問題)를 술회하기도 하고, 학문을 닦고 향리의 자제들을 가르치던 곳이 이 누각과 정자이다.
따라서, 누각과 정자를 무대로 하여 펼쳐졌던 누정문화의 형성과 전개, 또는 그 상황을 밝혀 보면 우리나라 전통사회의 사적 발전이나 상층문화권의 사회구조, 지역문화의 바탕과 그 특색 등을 이해하는 데에 큰 도움이 된다.
지식인들은 각박한 현실을 피하여 산수가 아름다운 자연을 좋아하였다. 거기서 정신적 즐거움을 찾고 위대한 자연을 배우는 삶의 방식을 추구하였다.
공동주거지의 마을로부터 떨어져 울타리도 없이 누정 그 자체를 자연의 한 부분으로 여겼으니, 우리 문화에서 보는 삶의 멋과 여유, 그리고 자연 순리의 사고는 바로 이러한 데서 연유한 것으로 생각된다.
우리 문화의 특징 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 있는 선비문화나 산수문화는 모두 누각과 정자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누정문화와도 직접 관계되는 것으로 이해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