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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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사
제도
조선시대 군적(軍籍) 편성시 정남(丁男)으로 군적에서 빠진 정호(丁戶), 또는 군적에서 고의로 정호를 빠뜨리는 행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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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조선시대 군적(軍籍) 편성시 정남(丁男)으로 군적에서 빠진 정호(丁戶), 또는 군적에서 고의로 정호를 빠뜨리는 행위.
내용

은정(隱丁)이라고도 한다.

조선 세조 이전의 군호(軍戶)는 인정(人丁)이 아닌, 자연가호를 중심으로 3정1호제(三丁一戶制)의 원칙에 의해 편성되었다. 이는 하나의 자연가호내에 다수의 인정이 기거하고 있을 경우 적절하게 군정을 확보할 수 없으므로, 자연히 많은 누정을 야기시키는 문제를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1459년(세조 5)에 호패법(號牌法)이 다시 실시되고, 1461년에는 2정1보(二丁一保)의 원칙에 입각한 보법(保法)에 의해 새 군적이 만들어지면서 많은 누정이 색출되었다. 당시 이 누정을 색출하기 위해 조정에서는 각 도에 군적사(軍籍使)를 파견하였다. 군적사들은 각 고을의 수령과 이정(里正)의 도움을 얻어 새 군적을 작성하였다.

조정의 누정 색출을 위한 관심은 이들 군적사들에게 내린 사목(事目)에 잘 나타나 있다. 즉, 이 사목에는 누정을 고발하는 사람에게는 누정수에 따라 가자(加資)한다는 포상 내용과, 5정 이상을 누정시킨 수령은 파출(罷黜)시킨다는 폄칙 조항이 규정되어 있다.

세조 때의 이러한 군적사 파견과 누정 색출작업은 외형적으로는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 1466년 하삼도(下三道)에서 새로 색출된 누정만도 9만8000여인에 이른 것이 그 한 예이다.

그러나 호구(戶口)를 조사하는 이정 등 말단관리들이 유력한 양반의 압력으로 양반가의 정호를 누정시켰다. 그리고 그 부담을 일반 양인들에게 전가시킴으로써 실제적으로는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이 때문에 많은 양인들이 양반가의 노비로 투탁하거나 승려로 변신해 군역을 피하고자 했으며, 심지어는 도망을 치기도 하였다. 이후에도 이러한 누정 현상은 크게 시정되지 못하고 지속되었다. 그래서 조정은 이의 처리를 위해 누정자에 대한 처벌을 강화하기에 이르렀다.

≪속대전≫에 규정된 처벌조항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① 호적 작성 때 가장으로서 1정을 누락시킨 자는 장(杖) 100을 치고 도(徒) 3년에 처한다. ② 사족(士族)으로서 3정 이상을 누락시킨 자는 무기한 유배시킨다.

③ 평민으로서 3정 이상을 누락시킨 자는 충군(充軍)시킨다. ④ 공사천(公私賤)으로서 3정 이상을 누락시킨 자는 장 100을 치고 절도(絶島)로 유배시킨다. ⑤ 감관(監官)·색리(色吏)로서 5정 이상을 누락시킨 자는 장 80을 치고, 10정 이상을 누락시킨 자는 장 80을 친 다음 도(徒) 2년에 처한다.

⑥ 반면에 누정자가 호구성적(戶口成籍) 후 1개월 이내에 자수하면 그 죄를 면하게 한다는 내용이다.

참고문헌

『세조실록』
『성종실록』
『대전회통』
『증보문헌비고』
『조선초기양반연구』(이성무, 일조각, 19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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