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릉 ()

고려시대사
유적
고려 제26대 충선왕의 능.
유적/고인돌·고분·능묘
양식
건립 시기
1325년(충숙왕 12)
관련 국가
고려
관련 인물
충선왕
내용 요약

덕릉(德陵)은 고려 제26대 충선왕의 능이다. 1325년 충선왕의 사후 개성부 서쪽으로 12리에 안장하였다는 기록이 있으나, 정확한 위치는 확인되고 있지 않다. 다만 1377년 공민왕비 노국대장공주의 정릉 재실을 조영할 때 덕릉의 나무를 베어 조성한 것으로 미루어 보아, 공민왕과 노국대장공주의 현정릉 근처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정의
고려 제26대 충선왕의 능.
건립경위

충선왕(忠宣王, 1275~1325, 재위 1298, 1308~1313) 왕장(王璋)은 고려 제25대 충렬왕의 장남이고, 어머니는 원나라 세조의 딸인 제국대장공주이며, 비는 원나라 진왕의 딸인 계국대장공주(薊國大長公主)이다.

1298년 아버지인 충렬왕의 선위로 왕위에 즉위하였으나 곧 실각하였다. 1308년 충렬왕의 사후에 복위하였다가, 재위 5년만인 1313년 아들 충숙왕에게 전위하였다. 1325년(충숙왕 12) 5월 신유 50세로 승하하여, 그해 11월 갑인일에 덕릉(德陵)에 안장되었다.

변천

충선왕의 주1은 그의 사후 56개월 존속되어 1330년(충혜왕 즉위) 6월 정미에 주2에 부묘되었다. 1371년(공민왕 20) 12월 기해일에 공민왕제릉서(諸陵署)를 관할하는 주3에게 법도에 맞게 하도록 하면서 제릉전직(諸陵殿直)을 새로 선발하도록 하였다. 공민왕은 이듬해 1372년(공민왕 21) 11월에 덕릉에 제사를 올리기도 하였다.

1366년(공민왕 4) 5월 계사일에 노국대장공주정릉 공사를 하면서 충선왕 덕릉에 있던 나무를 베어 정릉의 재실을 짓는 데 사용하였다는 기록으로 미루어, 그 위치는 공민왕의 현정릉 근처에 있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조선시대 주4』에 의하면 개성부 서방 12리에 충선왕의 덕릉이 자리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형태와 특징

덕릉은 1325년 충선왕의 사후 개성부의 서방 12리에 안장하였다고 기록되어 있고, 덕릉의 나무를 베어 노국대장공주의 정릉 재실을 만들었다는 기록으로 미루어 볼 때, 현재의 현정릉 인근에 있었다고 여겨진다. 그러나 정확한 위치가 밝혀지지 않아, 왕릉의 규모나 형태 및 특징에 대해 밝히기가 어렵다.

참고문헌

원전

『고려사(高麗史)』

단행본

장경희, 『고려왕릉(증보판)』(예맥, 2013)
장경희, 『고려왕릉』(예맥, 2008)
조선과학백과사전출판사·한국평화문제연구소, 『조선향토대백과』(평화문제연구소, 2005)

논문

홍영의, 「조선시대 고려왕릉의 현황과 보존 관리 실태」(『한국중세고고학』 제5호, 2019)
윤기엽, 「고려 혼전의 설치와 기능」(『한국사상사학』 제45집, 2013)
임영애, 「개성 공민왕릉 석인상 연구」(『강좌미술사』 17, 2001)

인터넷 자료

이북오도청(https://ibuk5do.go.kr/)
주석
주1

임금이나 왕비의 국장(國葬) 뒤 삼 년 동안 신위(神位)를 모시던 전각.    우리말샘

주2

종묘의 정전(正殿). 조선 시대에 역대 임금과 왕비의 위패를 모시던 사당으로, 초에는 목조, 익조, 탁조, 환조 등 태조의 사대조(四代祖) 신위를 모셨으나 그 후에는 당시 재위하던 왕의 사대조(四代祖)와 조선 시대 역대 왕 가운데 공덕이 있는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시고 제사를 지냈다. 19칸으로, 단일 건물로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길다. 우리나라 국보로, 국보 정식 명칭은 ‘종묘 정전’이다.    우리말샘

주3

고려 시대에, 제사를 주관하고 왕의 묘호와 시호를 제정하는 일을 맡아보던 관아. 문종 때에, 관제의 축소 개편으로 격하되어 ‘태상부’로 고쳤다. ⇒규범 표기는 ‘태상시’이다.    우리말샘

주4

조선 성종의 명(命)에 따라 노사신 등이 편찬한 우리나라의 지리서. ≪대명일통지≫를 참고하여 우리나라 각 도(道)의 지리ㆍ풍속과 그 밖의 사항을 기록하였다. 특히 누정(樓亭), 불우(佛宇), 고적(古跡), 제영(題詠) 따위의 조(條)에는 역대 명가(名家)의 시와 기문도 풍부하게 실려 있다. 55권 25책의 활자본.    우리말샘

집필자
장경희(한서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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