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경승 ()

목차
관련 정보
고려시대사
인물
고려후기 서북면병마사, 평장사, 문하시중 등을 역임한 무신.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미상
사망 연도
1197년(신종 1)
본관
만경(萬頃)
주요 관직
서북면병마사|평장사|문하시중
관련 사건
김보당의 난|조위총의 난
내용 요약

두경승은 고려후기 서북면병마사, 평장사, 문하시중 등을 역임한 무신이다. 출생일은 미상이며 1197년(신종 1)에 사망했다. 의종 때 공학군에 뽑혀 관직을 시작했다. 정중부의 난 때 무인들이 남의 재물을 약탈하는 와중에도 홀로 궁궐문을 지키면서 남의 재산을 범하지 않았다고 한다. 1173년(명종 3) 김보당의 반란을 집압하고 장군이 되었으며, 조위총의 반란도 진압했다. 1194년 이의민과 함께 문하시중이 되었다가 1196년에 중서령이 되었다. 이듬해 새로 정권을 잡은 최충헌에 의해 자연도로 귀양 보내졌다가 그곳에서 사망했다.

키워드
정의
고려후기 서북면병마사, 평장사, 문하시중 등을 역임한 무신.
개설

전주 만경현(萬頃縣) 사람으로 만경두씨(萬頃杜氏)의 시조이다. 학식은 없었으나 성품이 순후하고 가식이 적으며 용기와 힘이 셌다.

생애 및 활동사항

의종 때 공학군(控鶴軍)에 뽑혔다가 대정(隊正)이 되어 후덕전(厚德殿)의 견룡(牽龍: 衛士의 하나)이 되었다. 정중부(鄭仲夫)의 난 때 무인들이 남의 재물을 약탈했으나 홀로 전문(殿門)을 지키면서 남의 재산을 범하지 않았다. 명종산원(散員)이 되었다가 이의방(李義方)의 추천으로 내순검군지유(內巡檢軍指諭)가 되었으며, 뒤이어 낭장(郎將)이 되었다. 1173년(명종 3) 김보당(金甫當)이 반란을 일으키자 남로선유사(南路宣諭使)가 되어 인심을 수습하고 뒤이어 장군이 되었으며, 서북면병마부사가 되어 창주(昌州: 지금의 평안북도 창성)를 진수하였다.

이 때 서경유수 조위총(趙位寵)이 반란을 일으키자 개성으로 후퇴하였다가 다시 동로가발병마부사(東路加發兵馬副使)가 되어 고산(孤山) · 선주(宣州: 지금의 평안북도 선천) · 맹주(孟州: 지금의 평안남도 맹산) · 무주(撫州: 지금의 평안남도 덕천) 등지에서 무공을 세운 후 개성으로 개선하였다. 다시 후군총관사(後軍摠管使)가 되어 연주(漣州: 지금의 평안남도 개천)에서 적을 크게 무찔렀다.

1176년에 윤인첨(尹鱗瞻)과 함께 서경을 공격해 함락시키고 조위총을 사로잡아 죽였다. 그 뒤, 서북면병마사가 되어 영청(永淸: 지금의 평안남도 평원)을 진수했다. 이듬해 북로처치사(北路處置使)를 겸했고, 뒤이어 상장군 · 지어사대사(知御史臺事)에 올랐다. 1180년에 공부상서, 이듬해 호부상서, 1185년에 참지정사(參知政事), 1190년에 수태위(守太尉)가 되었다. 이듬해 판이부사(判吏部事) · 수국사(修國史)가 되어 주1를 맡았다.

뒤이어 평장사(平章事)가 되었다가 1193년 삼한후벽상공신(三韓後壁上功臣)이 되었으며, 다시 감수국사(監修國史)를 겸하였다. 이듬해 이의민(李義旼)과 함께 문하시중이 되었다가 1196년에 중서령(中書令)이 되었다. 이듬해 새로 정권을 잡은 최충헌(崔忠獻)에 의해 자연도(紫燕島)로 귀양갔다가 울분에 피를 토하고 죽었다. 그러나 두경승이 금을 가지고 있어 그의 종이 도둑질하려고 은밀히 죽였다고도 전한다.

참고문헌

『고려사(高麗史)』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주석
주1

관리들의 인물을 평가하고 기록하여 이를 참작해서 등용하던 일.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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