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세견 ()

조선시대사
인물
조선 후기 반남박씨의 구성원으로 공조정랑을 역임한 문신.
이칭
중고(仲固)
단애(湍厓)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619년(광해군 11)
사망 연도
1683년(숙종 9)
본관
반남(潘南)
주요 관직
공조정랑
내용 요약

박세견은 조선 후기의 대표적 소론(少論) 가문인 반남박씨(潘南朴氏)의 일원으로, 박세당의 둘째 형이자 공조정랑을 역임한 문신이다. 진사시에 장원 급제하는 등 학문적 능력을 바탕으로 다양한 관직을 역임하였다. 동생 박세당에게 학문적 영향을 크게 끼쳤다.

키워드
정의
조선 후기 반남박씨의 구성원으로 공조정랑을 역임한 문신.
가계 및 인적 사항

본관은 반남(潘南), 자는 중고(仲固), 호는 단애(湍厓)이다. 할아버지는 좌참찬을 역임한 박동선(朴東善), 아버지는 참판을 역임한 박정(朴炡), 어머니 양주윤씨(楊州尹氏)는 감사(監司)를 역임한 윤안국(尹安國)의 딸이다. 형 박세규(朴世圭)가 일찍 죽어서 동생 박세후(朴世垕), 박세당(朴世堂) 등에게 실질적인 맏형이었고, 함께 스승으로서의 역할도 일정 부분 담당하였다. 아버지 박정이 공신으로 받은 주1인 경기도 양주 장자곡(長者谷, 지금의 의정부시 장암동 일대)에 터를 마련하여 거주하였다.

주요 활동

1639년(인조 17) 진사시에 장원으로 급제하였고, 1643년 건원릉(健元陵) 참봉이 되었으나 얼마 후 사직하였다. 1644년에 주2, 1646년에 주3시직(侍直) · 위수(衛率) · 익찬(翊贊)을 거쳐 주4에 이르렀다. 1648년 흡곡현령(歙谷縣令)에 재직할 때에 동생 박세당이 할머니와 어머니를 모시고 가을에 흡곡을 방문하여 다음해 봄까지 머물렀다. 박세당은 여행 당시에 지은 시들을 모아 「동행습낭(東行拾囊)」으로 기록했다(『서계집』 권 1 수록).

이후 공조정랑과 마전군수(麻田郡守)를 역임하였고, 1654년(효종 5) 춘당대정시(春塘臺庭試)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655년 성균관 직강(直講)과 사헌부 장령(掌令)에 임명된 후 주5에 출입하며 국정 운영에 관해 다양한 논의를 제기하였다.

이후 정언 · 문학(文學) · 집의(執義) 등의 직책과 충청도 청풍군수 · 강원도사 · 통진현감(通津縣監) 등을 역임하였다. 1669년(현종 10)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보덕이 되고 동부승지 · 병조참의 · 좌부승지를 지냈다. 군읍(郡邑)을 다스릴 때 청렴하여 백성으로부터 인심을 얻었으나, 관리들의 비위에 맞지 않아 중상모략을 받았다.

참고문헌

원전

『서계집(西溪集)』

논문

이근호, 「조선 후기 潘南 朴氏 西溪 家門의 宗中 운영-京華士族 宗中 운영의 一例」(『장서각』 34, 한국학중앙연구원, 2015)
김종수, 「西溪 朴世堂의 使行 書信과 赴燕詩」(『민족문화』 37, 한국고전번역원, 2011)
주석
주1

고려ㆍ조선 시대에, 임금이 내려 준 논밭. 주로 외교와 국방 따위의 분야에서 나라에 큰 공을 세운 왕족이나 벼슬아치에게 내려 주었으며, 세습이 되는 토지와 안 되는 토지가 있었다.    우리말샘

주2

조선 전기에, 서울의 북악산, 인왕산, 남산, 낙산의 성첩(城堞)과 송림(松林)을 지키던 무관 벼슬. 네 명을 두어 각 산을 나누어 맡게 하였다.    우리말샘

주3

조선 시대에, 왕세자의 시위(侍衛)를 맡아보던 관아. 태조 때 두었다가 고종 32년(1895)에 없앴다.    우리말샘

주4

조선 시대 세자익위사 소속의 종5품 무관 벼슬

주5

조선 시대에, 사헌부와 사간원을 통틀어 이르던 말. 여기에 홍문관 또는 규장각을 더하기도 한다.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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