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순천(順天). 자는 숙필(叔彬), 호는 용담(龍潭)·도천(道川). 박한하(朴漢何)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참봉 박식(朴埴)이고, 아버지는 승지 박양좌(朴良佐)이며, 어머니는 성산배씨(星山裵氏)로 별좌(別坐) 배은(裵垠)의 딸이다.
어려서 가학(家學)을 수업하고, 23세에는 조식(曺植)을 찾아 덕산(德山)에 갔으며, 1572년(선조 5) 사마시의 향시(鄕試)에, 이듬해 사마시의 회시(會試)에 합격하였다. 1574년 노수신(盧守愼)을 찾아가 성리학을 깊이 연구하였다. 한 때 영숭전참봉(永崇殿參奉)으로 나갔으나 곧 사직하고 돌아와 학문에 몰두하였다.
1586년 별시 문과에 갑과로 급제해 승문원정자(承文院正字), 홍문관수찬(弘文館修撰)·교리(校理) 등을 지내고 1591년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를 다녀왔다.
임진왜란 때 김성일(金誠一)의 주청으로 종사관이 되어 크게 활약하였다. 1593년 10월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지제교(知製敎)·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을 지내고 다음 해 이조좌랑, 이어서 세자시강원사서(世子侍講院司書)를 겸직하였다.
1595년 이조정랑·홍문관부응교(弘文館副應敎)를 거쳐 1599년 사간원사간·사헌부집의(司憲府執義)에 있을 때 홍여순(洪汝諄)을 탄핵하였다.
1601년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상의원정(尙衣院正)을 지내고 이듬해 사헌부집의·홍문관직제학 겸 시강원보덕(弘文館直提學兼侍講院輔德)·동부승지·참찬관을 역임하였다. 당시 유영경(柳永慶)파인 소북(小北)으로서 반대 세력을 비방, 탄핵하였다.
1603년 동지정사(冬至正使)로 다시 명나라에 다녀왔고, 대사헌·이조참판·홍문관부제학(弘文館副提學)을 지냈다. 1608년 광해군이 즉위하자 정인홍(鄭仁弘)을 논계하였다. 이듬해 대사간이 되고, 이어 동지춘추관사·대사성을 거쳐 다시 대사간이 되었다.
1615년 폐모론이 일어나자 이를 반대하는 만언소(萬言疏)를 올렸다가 삭직되었다. 그 뒤 성주로 내려가 저술과 후진 양성에 힘썼다. 경상도 초계(草溪)에서 죽었다. 문장에 능했으며, 특히 시에 이름이 있었다. 성주의 청천서원(晴川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술로는 『용담집龍潭集)』·『정서절요(程書節要)』·『육경여해(六經蠡海)』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