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진원(珍原). 초명은 박희종(朴熙宗). 자는 자인(子仁), 호는 위남(葦南). 박첨(朴瞻)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박홍서(朴洪瑞)이고, 아버지는 현감(縣監) 박온(朴溫)이며, 어머니는 전의(田薿)의 딸이다.
생원으로 1401년(태종 1) 증광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406년 군자감승(軍資監丞)으로 전라도경차관(全羅道敬差官)에 임명됐고, 이어 세자부(世子傅)·좌정자(左正字), 이듬해 이조정랑이 되었으며 왕으로부터 사명(賜名)의 은전을 입었다.
1410년 점마별감(點馬別監)에 차정되어 헌마(獻馬) 업무를 관장하였으며, 1414년 하륜(河崙)이 발의한 통진고양포(通津高楊浦) 제방수축에 직예문관(直藝文館)으로서 참여하였으나 폐단이 일어 일시 파직되었다가 곧 복관되었다. 1415년 전라도경차관으로 관찰사 박습(朴習) 등과 김제 벽골제(碧骨堤)를 수축하였다.
1416년 동궁서연관(東宮書筵官)·예문관지제교(藝文館知製敎)·겸춘추관기주관(兼春秋館記注官)의 화요직(華要職)을 역임하였으며 1421년(세종 3) 영암군수(靈巖郡守)를 지냈다. 1422년 회례사(回禮使)로 일본에 가서 왜구를 금하고 피로인(被擄人)을 쇄환하는 일에 실효를 거두었으며, 이 공으로 예문관직제학(藝文館直提學)에 올랐다.
1426년 남원부사 재직 시 관청의 물품을 횡령하고 뇌물을 받은 일로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고, 결장(決杖)과 자자(刺字)의 형을 받았다. 『해동필원(海東筆苑)』에 이름이 오른 명필로, 하륜의 아버지 하윤린(河允潾)의 신도비를 쓰고 음기(蔭記: 비의 뒷면에 기록되는 글)를 짓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