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엄사는 삼국시대 신라 시기의 경상남도 합천군 대양면에 있었던 사찰터이다. 창건 후 폐허가 되었다가 906년(효공왕 10)에 사목곡(沙木谷)의 승려 양부(陽孚)가 중창하고 선종(禪宗)의 중심도량으로 만들었다. 1065년(문종 19) 11월에는 이 절의 주지 미정(微定)이 「원중상규(院中常規) 10조(十條)」를 정하고 5층석탑을 세워 부처의 진신사리 24립(粒)을 봉안하였다. 조선 전기 폐사된 것으로 추정된다.
대동사(大同寺) 또는 백암사지(伯巖寺址)라고도 한다. 창건 연대는 미상이나 신라시대에 엄흔(嚴欣)과 백흔(伯欣)이 살던 집을 희사하여 이 절을 창건하고 두 사람의 이름 중 한 글자씩을 따서 백엄사라 하였다고 전한다. 또 일설에는 신라 때의 북택청(北宅廳) 터를 희사하여 창건하였다고도 한다. 창건 후 건물이 헐어 한때 폐허가 되었다가 906년(효공왕 10)에 희양산파(曦陽山派) 승려 사목곡(沙木谷)의 양부(陽孚)가 중창하고 주지가 되어 선종(禪宗)의 중심도량으로 만들었다.
925년(태조 8)에 희양산파 제3조 정진대사(靜眞大師) 긍양(兢讓)이 와서 스승 양부의 뜻을 이어 10년 동안 후학을 지도하다가 다시 희양산으로 돌아갔으며, 그 뒤를 이어 신탁(神卓)이 남원 백암사에서 이 절로 옮겨와 주지가 되었다.
1065년(문종 19) 11월에는 이 절의 주지 미정(微定)이 「원중상규 10조(院中常規十條)」를 정하고 5층석탑을 세워 부처의 진신사리 24립(粒)을 봉안하였다.「원중상규 10조」에는 사재로써 보(寶)를 세워 사리탑을 공양할 것, 이 절의 호법경승(護法敬僧)인 엄흔과 백흔과 근악(近岳) 등 삼위전(三位前)에는 보를 세워 공양할 것, 금당인 약사전(藥師殿)에는 나무 바루로 매달 초순에 공양미를 올릴 것 등의 조항이 남아 전해지고 있다.
백암사는 1407년(태종 7)에 자복사(資福寺)를 대체하는 천태종 명찰(名刹) 중 하나로 지정되었다. 이후 다른 기록에서 잘 보이지 않아 조선 전기 폐사된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의 절터 가운데 일부는 경작지로 변하였으며, 절터에는 1963년 보물로 지정된 합천 백암리 석등과 1972년 경상남도 유형문화재(현, 유형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대동사지 석조 여래 좌상이 남아 있다. 석등은 신라시대의 작품으로 화사석(火舍石)을 고정시키기 위한 치석(治石)을 사용하고 있어 특이하며, 또한 사천왕상(四天王像)의 조각 등은 주목되는 양식수법이다.
석조 여래 좌상은 8각의 하대석(下臺石) 뒤에 8각의 간석(竿石)을 올려 간석 8면에는 각각 신상(神像)을 새겼으며, 그 위의 상대석에 결가부좌한 여래가 앉아 있다. 불상은 얼굴 부분의 마멸이 심하며 육계(肉髻)는 뚜렷하다. 일부를 시멘트로 보수하였으나 조각 수법이 석등의 것과 비슷한 것으로 보아, 통일신라시대의 작품으로 추정되고 있다. 좌대 높이 60㎝, 불상 높이 150㎝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