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사』에서는 “보(寶)라는 것은 우리나라 말이다. 돈이나 곡식을 시납하여 원금은 보존하고 이식(利息)을 취하는 것인데, 오랫동안 이익이 되므로 ‘보’라고 부른다.[보자방언야 이전곡시납 존본취식 이어구원 고위지보(寶者方言也 以錢穀施納 存本取息 利於久遠 故謂之寶)]”고 설명하고 있다. 돈과 곡식의 시납에는 불교의 복전(福田) 사상이 내포되어 있고, 민에게 대여하여 주는 것은 빈민 구제의 성격을 띠므로 보시(布施) 사상이 함축되어 있다.
보는 기본적으로 원본은 유지하고 받아들인 이자를 특정한 용도에 지출하는 것으로서, 기금의 성격을 띠고 있다. 보의 기금에는 곡식, 포, 화폐가 많이 보이지만, 토지와 노비도 포함된다. 사원에서 일정한 기금을 확보하여 차대(借貸) 행위를 하는 경우, 보라고 명시하지 않아도 보의 형식으로 운영된 것으로 보인다. 우리나라에서는 불교계가 운영하는 차대를 보로 일컬었지만, 중국의 당나라에서는 무진장(無盡藏)이라고 불렀다.
보에 관한 첫 기록은 삼국시대의 점찰보(占察寶)에 관한 기록이다. 원광이 거처하고 있는 가서갑에 설치한 점찰보에 단월이 토지를 시납하였다. 그리고 혜공왕 대에 김유신을 위한 공덕보전(功德寶田) 30결을 국가에서 지급하여 김유신의 명복을 빌게 하였다. 점찰보와 공덕보의 기금은 토지였다.
고려 초기에 태조 왕건이 서경의 학교 교육 진흥을 위하여 곡식 100석(1석=약 180ℓ)을 사여해 학보(學寶)로 삼은 일이 있다. 또 광학(廣學)과 대연(大緣) 승려가 도움을 주자, 태조가 그들의 부모기일보(父母忌日寶)를 돌백사에 두고 전답을 내렸다. 이후 고려시대에 보가 크게 성행하였다.
고려시기 보의 종류는 매우 다양하였다. 국왕의 장수 · 복 · 안녕 등을 기원하기 위해서 설치된 축성보(祝聖寶), 현종 대에 반야경 등 경전을 인쇄하여 보급하기 위한 기금으로 현화사에 설치된 반야경보(般若經寶) 등이 있다.
또한 죽은 부모의 명복을 빌기 위한 기일보(忌日寶), 종의 관리를 위한 금종보(金鍾寶), 외침이 닥쳤을 때 안녕을 기원하기 위한 진병보(鎭兵寶), 관인 유력층의 개인수복(個人壽福)을 위한 장년보(長年寶), 정종 대에 승려들의 수행을 장려하기 위하여 설치한 불명경보(佛名經寶)와 광학보(廣學寶), 사원 운영의 총괄적인 재정을 위하여 설치한 상주보(常住寶)가 있었다. 그 밖에 제위보(濟危寶), 팔관보(八關寶), 관마보(官馬寶) 등이 보인다.
보는 불교계에서 주로 운영하는 것이었지만 국가나 세속 사회에서도 찾을 수 있다. 세속 사회에서도 기금을 마련한 뒤 원본을 두고 이자를 받아 그것을 특정 용도에 지출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것은 기금제라는 불교계의 보가 영향을 준 결과이다.
고려시대에 사원에서 운영하는 보의 규모는 컸다. 고려 초기 정종 대에 7만 석에 달하는 상당한 곡물로 보를 설치하였는데, 이때 금강산의 장안사는 특별 대우를 받아 2천 석을 받았다. 명종 대에는 차대에 활용한 곡식이 용문사에 700석, 용암사에 2,000석, 용수사에 1,000석이 있었다.
그리고 공민왕 대에 운암사에는 1만 5293필의 포가 원본이었다. 고종 대에 최우의 아들 만종과 만전은 경상도에서 축적한 쌀 50여 만석을 사용하여 차대 활동을 전개하였다. 개별 사원의 재정 수입 구성을 보면, 농지를 경영히야 얻는 수입보다 보를 통한 차대에서 벌어들이는 수입이 더 많은 경우가 적지 않았다.
보를 운영하는 방식은 다양하였다. 국가에서 대규모의 쌀과 포를 사여하여 보를 설치한 경우, 국가의 관원이 이를 운영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사원 스스로 보를 운영하였다. 사원의 보를 관리하는 사람으로 보장(寶長)과 색장(色掌)이 있었는데, 보장은 보의 총 관리자이며, 색장은 대출 장부와 이식을 계산하는 실무자였다. 이들을 총괄하는 상위의 승려는 주지(住持)였다. 수선사의 경우 1만 석이 넘는 보를 11개의 말사에서 운영하였다.
보의 이자율은 고려시대에는 일반 차대 규정을 따라 1/3이었다. 그런데 1/3을 상회하는 높은 이자율로 운영되는 경우도 적지 않았고, 불필요한 이들에게 강제로 빌려주는 일도 있었다. 이자 수입의 안정성이 떨어져 시간이 흐름에 따라 보의 기능을 상실하는 보가 많았다.
보를 설치하여 이자를 받는 것은 대개 불사(佛事)와 관련한 지출을 하기 위함이었다. 이자를 납부하는 이는 불사에 동참한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세속인의 차대보다 사원의 보는 이자를 회수하는 비율이 높았을 것이다. 불교계의 보 기금을 빌린 경우, 백성으로서는 이자를 납부하는 부담을 지지만 다른 한편으로 춘궁기에 굶주림을 면할 수 있었다. 이는 보가 빈민 구제의 성격을 띠고 있음을 의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