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총(性聰)은 호는 백암(栢庵)이고 법명이 성총(性聰)이다. 그는 1631년(인조 9) 11월 15일 전라남도 남원에서 태어났다. 속성은 이씨로 아버지의 이름은 강(棡)이고 어머니는 하씨(河氏)이다. 1643년(인조 21) 13살 때 순창 취암사(鷲巖寺)에서 머리를 깎고 16세에 구족계를 받았다. 1648년(인조 26)에 지리산 취미 수초(翠微守初, 1590~1668)의 문하에서 9년 동안 가르침을 받았다. 1657년(효종 8) 전라남도 곡성 도림사 선덕암에 주석하였다. 1673년(현종 14)에는 영광 해불암에 머물렀으며, 1676년(숙종 2) 전라남도 순천 송광사 은적암으로 옮겼다가 1677년(숙종 3) 주암 대광사에 머물렀다. 이후 순천 송광사, 영광 불갑사, 낙안 징광사 등에 머물다가 1700년(숙종 26) 7월에 지리산 화개동 신흥사에서 입적하였다. 세속 나이 70세, 법랍 55세였다. 성총의 사리를 안치한 부도는 순천 송광사와 지리산 칠불암에 있고, 비(碑)는 순천 송광사에 있다. 저서로는 『치문집주(緇門集註)』 3권, 『백암집(栢庵集』 2권 등이 있다.
성총은 부휴 선수(浮休善修, 15431615), 벽암 각성(碧巖覺性, 15751660), 취미 수초로 이어지는 부휴계의 법맥을 이었다. 그는 1678년(숙종 4)에 설명(雪明)을 시켜 송광사사원사적비(松廣寺嗣院事蹟碑)와 보조국사감로탑비(普照國師甘露塔碑)를 건립하고, 부도전(浮屠殿)에 부휴계 적전(嫡傳)의 탑을 순서대로 조성하였다. 이를 통해 성총은 부휴계가 송광사에서 보조 지눌(普照知訥, 1158~1210)의 유풍을 계승하는 계파임을 천명한 것이다.
1681년(숙종 7) 6월 성총은 전라남도 임자도(荏子島)에 표류한 중국 선박에 실려 있던 『가흥대장경』을 수집하여 낙안 징광사로 싣고 가서 복각하였다. 성총이 간행한 불서는 『화엄경소초(華嚴經疏鈔)』 · 『금강반야경소론찬요간정기회편(金剛般若經疏論纂要刊定記會編)』 · 『정토보서(淨土寶書)』 · 『대명삼장법수(大明三藏法數)』 · 『대승기신론소필삭기회편(大乘起信論疏筆削記會編)』 · 『사경지험기(四經持驗記)』 등 『가흥대장경』 10종 159권과 그 외 『대혜보각선사서(大慧普覺禪師書)』 · 『법집별행록절요병입사기(法集別行錄節要幷入私記)』 · 『선원제전집도서(禪源諸詮集都序)』 · 『고봉화상선요(高峰和尙禪要)』 등을 포함하여 총 15종 167권에 달한다. 또한 계파 성능(桂坡聖能)을 통해 지리산 쌍계사에서 『가흥대장경』 불서 『화엄현담회현기(華嚴懸談會玄記)』를 복각하였다.
조선 후기 불교계에서는 청허 휴정의 법맥을 계승하는 청허계와 부휴 선수의 법맥을 계승하는 부휴계가 경쟁하였다. 병자호란 때 의승장이었던 벽암 각성 이래 성립되기 시작한 부휴계는 성총에 이르러 그 계파적 정체성이 확립되었다고 평가된다. 성총은 송광사에서 보조 지눌의 유풍을 강조하면서 아울러 부휴계의 법통을 선양하였던 것이다.
또한 성총은 『가흥대장경』과 여러 불서를 전라남도 낙안 징광사를 중심으로 인근 사찰에서 간행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이는 조선 후기 최대의 불서 간행 사업이었다. 더구나 그가 간행한 불서는 대부분 사찰 강원(講院)의 교재 및 참고서였으므로, 성총은 강학을 발전시키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고 평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