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동. 1985년 광주광역시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이 삼강문은 원래 1635년(인조 13)에 건립하여 양산숙과 효자·열녀·절부 각 두명씩 7위를 표창하였으나 그 뒤 나주임씨 문중에 출가하여 순절한 양산룡(梁山龍)의 딸은 따로 정려를 모시고 있어 6위가 표창되고 있다.
양산숙 외에 형제인 양산룡과 양산수(梁山岫), 어머니 죽산박씨, 누이인 김광운(金光運)의 처 양씨, 양산숙의 처 광산이씨 등이다. 이곳은 생장지인 박뫼(博山)마을 앞 산기슭으로 삼강문은 정면 5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이다.
각 기둥 사이에 홍살문을 달았고 삼문과 담장으로 둘러져 있다. 1803년에 이헌중(李憲中)이 ‘양씨삼강문(梁氏三綱門)’이란 현판을 썼다. 양산숙은 양응정(梁應鼎)의 아들로 진주성 싸움에서 성이 무너지자 김천일·최경회·고종후(高從厚) 등과 함께 남강에 몸을 던져 순국하였다.
양산룡도 김천일을 도와 의병에 가담하였고 정유재란 때 가족들을 피난시키고자 나주 삼향포(三鄕浦, 현재의 무안)에서 뱃길로 떠나려고 할 때 왜적들이 나타나자 그와 어머니 박씨부인을 비롯한 가족들이 모두 바닷물에 몸을 던져 정절을 지켰다. 정려는 여러 차례 상소 끝에 인조 13년 생원 홍탁의 상소로 세워지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