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업 ()

오징어잡이 배
오징어잡이 배
산업
개념
수산동식물을 잡거나 기르는 사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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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수산동식물을 잡거나 기르는 사업.
개설

어업은 크게 두 가지로 그 의미를 나눌 수 있다. 넓은 의미로 사용할 때는 수산업과 동의어로 어로 · 양식 · 수산제조를 포괄하며, 좁은 의미로 쓰일 때는 어로 및 양식만을 지칭한다. 여기에서 대상으로 하는 어업은 후자, 즉 좁은 의미의 어업임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어업은 수계(水界)의 유용 수산동식물을 생산의 대상으로 하는 제1차산업이다. 생산의 대상으로 삼는다는 것은 천연적으로 번무(繁茂)하는 유용 수산동식물을 채포(採捕)하거나 길러서 포획함을 뜻한다.

이와 같이 어업은 자율적 재생산법칙을 가지고 있는 수산자원을 대상으로 할 뿐 아니라, 노동의 장소 또한 기상 · 조류 · 수온 등에 따라 이변이 큰 수계라는 데 그 특질이 있다.

어업은 기준 여하에 따라 여러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먼저 어업활동이 이루어지는 장소가 어디냐에 따라 해면어업(海面漁業)과 내수면어업(內水面漁業)으로 나누어지고, 해면어업은 거안(距岸) 거리에 따라 다시 연안어업, 근해어업, 원양어업으로 분류된다.

연안어업은 아침에 출어하여 석양에 돌아올 수 있는 거리 안에서 이루어지는 어업으로 그 규모도 작고 경영형태도 어가어업(漁家漁業) 중심인 데 반하여, 원근해어업은 규모도 크고 경영형태도 자본제적 기업 어업이 주종을 이루고 있다. 그러나 연안어업이라고 해서 반드시 영세어가 어업만은 아니고 대형정치망 어업처럼 기업 어업도 없지 않다.

어업은 또한 수계에 천연적으로 서식하는 어류나 해조류를 그대로 포획, 채취하는 잡는 어업과 인위적으로 양식하거나 증식시켜 채포하는 기르는 어업으로 나누어지는데, 그 발전 방향은 잡는 어업에서 기르는 어업으로 나아가고 있다.

우리 나라는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국토면적에 비한 해안선의 길이 비율이 세계 최장이며, 동남서 근해의 총면적 약 148만 7000㎢, 그 용적 약 172만 4000㎦는 육지면적의 7배에 달하는 광대한 해역일 뿐 아니라, 이러한 넓은 바다의 해황(海況)은 고르고 부존자원은 풍부하여 우리 나라 어업의 자연조건은 아주 천혜적이라 할 수 있다.

발달과정

어류는 그 분포가 넓고 부존량이 풍부하며 필요에 따라 언제라도 획득할 수 있는 식품이기 때문에 곡물이나 수렵 산물보다도 오히려 앞서 식용되었다. 따라서 수계의 개발 · 이용은 인류의 역사와 함께 시작되었을 것이다.

선사시대의 우리 민족이 한반도에서 생활을 하기 시작한 때로부터 하천이나 해안에서 많이 나는 어개류(魚介類)를 잡아 식용하였고, 따라서 어업은 그들의 주요한 생업의 하나가 되었으리라는 사실은 패총을 비롯한 많은 유적들이 말해 주고 있는 바와 같다.

이들 패총에서 출토된 물품은 굴 · 백합 등의 함수성(鹹水性) 패류와 갑각류 · 참돔 · 삼치 등의 어골, 고래 뼈제품과 함께 골살 · 낚싯바늘 등으로 구성되어 있는바, 그로써 선사시대 우리 조상들의 어로생활 상태와 연안에서 산출된 어개류의 종류 등을 엿볼 수 있다. 특히 위험성이 높고 고도의 포획기술이 필요한 포경업도 선사시대에 이미 행해지고 있었음이 울주의 반구대(盤龜臺) 암각화(巖刻畫)에서 입증되고 있다.

유사시대에 내려오면 비록 우리 자신의 것은 아니나, 중국측의 문헌인 『삼국지』 위지, 『후한서』 동이전 등을 통해 예 · 옥저 · 삼한 등 부족국가의 어로생활을 짐작할 수 있으며, 동시에 중국과의 조공(朝貢)에서 해산물이 큰 몫을 차지하고 있었음을 엿볼 수 있다.

고구려는 큰 산 심곡이 많고 넓은 못이 적다는, 그러한 지리적 조건으로 말미암아 삼국 중에서 어업이 가장 뒤떨어졌으나 국토의 확장과 더불어 점차 내수면어업에서 해면어업까지 진출하게 되었다. 또한 어법도 어량어업(漁梁漁業)까지 어루어지고 있었음을 수나라 양제의 제2차 고구려 원정에 관한 기사에 ‘어량’이라는 용어가 사용되고 있는 데에서 미루어 헤아릴 수 있다.

백제는 반도의 서남해안에 좋은 어장을 차지한 지리적 조건에 힘입어, 국가를 완성한 4세기 중엽부터는 특히 어업의 발전을 보였다. 그리고 그 산물이 비단과 함께 중국과의 교역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였음은 『삼국사기』 백제본기 개로왕조에 보이는 바와 같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탈해왕의 전설에 의하면, 그는 본래 고기낚시를 생업으로 삼았었다고 하니, 신라가 당시에 이미 동해안에서 낚시어업을 행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간접적으로 비추고 있다. 또한, 『삼국유사』에는 연오랑(延烏郎)과 세오녀(細烏女)의 기록이 보이는바, 이것 역시 전설적인 내용이기는 하나 신라에서 일찍부터 해조류가 많이 채취되고 있었음을 간접적으로 전해 주고 있다.

또 통일신라시대에 이르면 해상활동이 더욱 활발해졌음을 장보고의 해상활동상이나 일본인들이 말하는 이른바 ‘신라구(新羅寇)’에서 짐작할 수 있다. 이와 같이 해양을 무대로 한 활동이 활발했다면 역시 해양을 기반으로 하는 어업생산활동도 성했으리라는 사실은 추측하기에 어렵지 않다.

또한 통일신라시대에는 나잠업을 포함하는 해면어업이 상당한 정도로 발달되었고, 다시마를 비롯한 해조류의 채취도 활발했다는 점을 『해동역사(海東繹史)』를 통해 살펴볼 수 있다.

한편, 어류의 양식에 관해서는 이렇다 할 기록이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1세기 초에는 잉어의 양식이 이루어졌던 것 같으며, 식품(특히 어류)을 저장하기 위해 겨울에 언 천연빙을 채취, 저장해 두었다가 여름철에 사용했다는 사실은 경주의 석빙고(石氷庫)가 보여주는 바와 같다.

10세기 초 신라의 옛 영토를 다시 통일한 고려는 좋은 어장을 대부분 차지하여 어업 발전에 알맞는 자연지리적 조건도 지니고 있었다. 그래서 숭불사상에 의한 어업의 억제, 권문세가에 의한 가혹한 수탈, 빈번한 왜구의 침범과 같은 저해요인이 끊임없이 작용했는데도 불구하고 어업은 농업 다음가는 중요 산업으로서 이미 중기 이후에는 그 뒤에 보이는 각종 수산물을 볼 수 있었으며, 방법 또한 상당히 진보되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고려시대의 어업에 대해 알려 주는 문헌은 『고려도경』 · 『고려사』 · 『고려사절요』 등 비교적 많다. 그 중에서 당시의 어업에 대해 잘 전해 주는 자료인 『고려도경』 잡속(雜俗)에 나타난 기록 중에 어업에 관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 당시의 풍속이 왕공귀인은 양돈(羊豚)을 식용하는 반면, 세민(細民)은 해산물을 많이 먹는데 해조류와 곤포(昆布:다시마)는 귀천을 가리지 않고 즐겨 먹는다는 것, ② 어부들은 썰물 때마다 배를 타고 섬 주변에서 포어(捕魚)하지만 그물이 소포(성기게 짠 베)를 사용하기 때문에 노력에 비해 성과가 적다는 것, ③ 굴 등 패류는 풍부하고 정착성 수산물이기 때문에 물이 빠져도 나가지 않아 쉽게 잡을 수 있다는 것 등이다.

또한 『고려도경』의 부족한 점을 보완해 주는 자료는 『고려사』 · 『고려사절요』 · 『세종실록』 지리지 등이 아닌가 한다. 이들 제 문헌에서 곳곳에서 발견되는 사실들을 종합해 볼 때 고려시대의 어업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그 산물의 내용이 해조 · 미역 · 어포 · 살조개 · 조개 · 소라 · 구갑 · 새우 · 고래기름 · 젓갈 등에 이르러 오늘날 우리 나라 연안에서 나는 수산물 전반을 거의 망라하고 있을 뿐 아니라, 간단한 것이기는 하지만 가공품까지 만들어 내고 있었다.

둘째, 어선어업도 행해지고 있었으나, 고려의 대표적인 어업은 어량어업으로 그 시설이 전 해안에 널리 분포되어 하사(下賜)의 대상이 되기도 하고, 권문세가들의 가혹한 점탈대상이 되고도 있는데, 이는 그러한 어장에 대한 경제적 가치가 증대되었음을 반증하는 점이라고 할 것이다.

셋째, 고려시대에는 특산물을 전문적으로 생산하는 소(所)가 어량소(魚梁所) · 곽소(藿所) · 망소(網所) 등 어촌에도 붙여지고 있는 것을 볼 때 순어(純漁)의 생업형태를 갖는 어촌이 생겨나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고려시대 어장의 소유형태와 어업의 경영형태는 경지에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① 국가의 처분 · 관리에 기초한 어장 지배, ② 어장주(감영 · 수영 · 제 궁가 등)의 수세기능에 기초한 어장 지배, ③ 어민의 어장 용익권에 기초한 어장 지배로 3분되어 저마다 어장 소유주로 생각하고 있었지만, 가장 본질적인 소유형태는 어민들의 원생적인 조직인 어촌공동체의 총유(總有:공동소유의 한 형태)요, 그에 기초한 어민들의 공동경영이 보편적 경영형태라고 믿어진다.

그리하여 고려의 어정사(漁政史)는 경지에서와 마찬가지로 공유어장에 대한 사점의 비중이 커져 가는 역사가 아니었나 생각된다.

조선시대의 어업은 숭불사상의 쇠퇴, 면업의 발달에 의한 면망의 도입, 인구 증가로 인한 수산물에 대한 수요 증가 등에 의해 발전할 수 있는 요인이 조성되었으나, 문헌이 전해 주는 바를 종합해 볼 때 고려시대에 비해 단순한 양적인 확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조선시대 어업의 사정을 알려 주는 문헌은 『조선왕조실록』을 비롯하여 『신증동국여지승람』 · 『임원십육지』 · 『자산어보』 등 상당수를 헤아릴 수 있다.

이들 문헌을 통해서 우리들이 미루어 판단할 수 있는 바는, ① 수산물의 종류가 다양하고, ② 어업이 동남서해안에 걸쳐 광범하게 영위되었으며, ③ 어획량 또한 상당량에 달하였다는 점이다.

첫째, 『세종실록』 지리지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보이는 수산물의 종류와 수가 한말에 간행된 『한국수산지』(1908)에 나오는 것과 거의 일치한다. 즉, 『세종실록』 지리지에는 어류 44종, 패류 12종, 해조류 19종, 기타 수산물 13종, 모두 합하여 98종(그 밖에 가공품 및 기타 24종이 기록되어 있음)이 기록되어 있으며, 그보다 80년 뒤에 간행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어류 51종, 패류 16종, 해조류 13종, 기타 15종, 모두 합하여 95종으로 거의 같다.

한편, 한말의 『한국수산지』에는 어류 60종, 패류 18종, 해조류 6종, 해수류 6종, 기타 10종, 모두 합하면 103종이 기록되어 있어 그 사이에 큰 차이는 볼 수 없고, 다만 해수류가 따로 분류되어 있는 정도의 차이만을 읽을 수 있다.

둘째, 『세종실록』 지리지에 나타난 어량의 분포상을 보면, 충청도 136개 소, 황해도 127개 소, 전라도 50개 소, 경기도 34개 소, 경상도 7개 소, 함길도 2개 소로 기재되어 강원도와 평안도에는 어량이 없는 듯하나,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평안도의 여러 곳에 어량이 존재하고 있었음을 기록하고 있다. 이로 미루어 볼 때, 비록 밀도의 차이는 있으나 동남서해안의 전 해역을 망라하고 있음을 알 수 있으며, 따라서 우리 나라 전체 해면에서 광범위한 어업이 전개되고 있었음을 말해 주는 것이라고 하겠다.

셋째, 영조가 박문수(朴文秀)를 충주목사에 임명하여 삼남의 어염(漁鹽)을 관장하게 한 뒤 “삼남의 어염 소득이 얼마냐?”고 묻자, ‘10만 냥에 모자라지 않을 것’이라고 대답했다는 기록이 있다. 거기에는 염업 소득이 포함되어 있기는 하지만, 1863년(고종 1)의 우리 나라 해세(어염선세) 총액이 7만8233냥이었다는 사실을 감안할 때 결코 적은 금액이라고 할 수 없을 것이요, 그만큼 어업이 성황이었음을 시사해 주는 것이라고 하겠다.

그러면 조선시대에도 우리의 어업은 한결같이 어로의 영역에만 머물고 있었을까. 바꾸어 말하면, 수계에 적극적으로 노동을 가해 생육과 번식 보호를 촉진시켜 그것을 채포하는 양식업은 없었던 것일까. 이미 1세기경에 잉어를 못에서 길렀다는 점을 지적하였거니와, 조선시대에도 태종 때부터 연못에서 잉어를 기르는 일이 이루어지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바다에서 어류와 패류를 양식한 것은 한말에 이르기까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다만, 한말에 광양만 내의 섬진강 하구에서 굴을 양식했고, 여자만 내의 장도(獐島) · 대포(大浦) · 하대진포(下大津浦) 등지에서 고막을 양식했으나 그 규모가 작고 일종의 축양 정도에 불과했던 것 같다. 천연패류가 풍부한 당시로서는 굴을 애써 양식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을 것이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해태양식은 일찍부터 개발되어 상당히 활발히 행해지고 있었다. 우리 나라 최고(最古)의 지리지인 『경상도지리지』 동평현 · 울산군 · 동래현 · 영일현 · 안동대도호부의 토산공물조에 해의(海衣)라는 이름으로 해태가 실려 있는 것을 보면 적어도 560여년 전에 우리 나라에서 해태가 채취, 식용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렇다고 이 기록이 바로 우리 나라에서 해태를 양식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말해 주는 것은 아니다. 천연해태(석태)가 얼마든지 존재하기 때문이다. 우리 나라에서 언제부터 해태가 양식되기 시작했는지에 관해서는 여러 설이 분분하므로 일률적으로 단정하기는 어려우나, 적어도 일본인들보다 70∼80년은 앞서 해태를 양식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양식지는 섬진강 하구의 광양에서 시작되어 점차 서쪽으로 번져 완도에 이르러 크게 번성한 것으로 짐작된다.

다음에는 조선시대 어장의 소유형태와 그 경영형태는 어떠했으며, 어민의 신분은 어떠했는가에 관해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어장은 배타독점적 지배 · 관리의 가능성 여하에 따라 만인의 자유어업에 방임하는 원근해어장과, 독점적 관리 · 이용이 가능하고 소유권이 성립하는 연안어장으로 대별된다. 조선시대에도 소유의 측면에서 문제가 되는 어장은 더 말할 나위도 없이 연안어장이다. 그런데 연안어장은 개별적인 구획이 가능한 곳과 그렇지 못한 포안(浦岸)으로 나누어진다.

후자는 원야(原野)와 마찬가지로 마을이 공동으로 점취하여 공동경영했으리라는 것은 오늘날의 공동경영으로 미루어 능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또 개별적으로 시망(施網)이 가능한 전자의 경우에는 사점화(私占化)와 국가에 의한 환수가 되풀이되는 과정에서 사적 소유가 점차 확대, 강화되어 근대에 이르면 마침내 사유로 바뀐 것으로 판단된다.

조선시대의 신분계층은 크게 양반 · 양민(상민) · 천민으로 구분되며, 양반은 지배계층, 양민과 천민은 피지배계층에 속함은 이미 알고 있는 바와 같다. 이들의 직업은 사 · 농 · 공 · 상으로 나누어져, 사는 양반계층으로 관료와 선비(유생)가 그 주축을 이루었고, 농은 대부분 양민의 업이었으며, 상 · 공은 천업으로 생각되어 왔다(계층 사이에 중인이 존재했음을 부인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면 여기에 들지 않는 어민은 어디에 속하는 것일까. 어민의 태반이 어업을 전업으로 하지 않고 반농반어의 생업형태를 지니고 있었던 점을 감안한다면 농민과 같이 양민에 속할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조선 초기부터 어염업은 천업 내지 고역(苦役)으로 보아 왔고, 따라서 어부나 염부들을 어한(漁漢) · 염한(鹽漢), 혹은 수말자(遂末者)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또한 전업적인 어촌을 망소 · 곽소 등 천민 마을을 지칭하는 소(所)로 호칭한 점 등을 감안할 때, 어민은 대체로 천민에 속한 것으로 믿어진다. 그리고 이와 같은 천시와 수탈이 어업의 발전을 가로막는 결정적인 요인이라 생각된다.

한말에 이르면 우리의 어업은 외부, 특히 일본에서 거세게 밀려오는 새로운 어법과 어선의 영향을 받으면서 그것을 능동적으로 수용하지 못한 채, 황금어장을 그들에게 점차적으로 침탈당하면서 한편에서는 여전히 재래식 어업을 고수하고 있었다.

이 무렵 우리의 재래식 어업은, ① 연안에 고정시설을 설치해 두고 회유해 오는 고기를 포획하는 정치망어업, ② 포 안의 암벽에 천연적으로 번무하는 미역 등 해조류의 채취어업, ③ 극히 부분적이기는 하지만 해태를 중심으로 하는 양식업, ④ 중선(中船)을 주축으로 어선을 이용하여 회유하는 고기를 적극적으로 포획하는 어선어업으로 대별할 수 있다.

정치망어업의 주종을 이루는 것은 어장(漁帳)과 어전(漁箭)으로, 그것들은 권문세가들에 의해 사점화되었거나, 수영(水營)이나 감영에 의해서 경영되었고, 채취어업은 포 안을 공동으로 점취하고 있는 어촌공동체에 의해 공동경영되고 있었으며, 양식업은 몇몇 선구적인 어민들에 의해 개별적으로 경영되고 있었다.

어선어업은 명태어업 · 조기어업 · 대구어업 · 청어어업 · 멸치어업 · 새우어업 등 이른바 6대 어업을 어선을 이용하여 영위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경영형태는 거친 바다에 나가 조업할 만한 노동력과 어선 · 어구 등을 어느 정도 출자할 수 있는 자본을 가진 몇 사람의 어가들이 어업계(漁業契) 등을 조직하여 영위하는 조합식 공동경영의 형태를 취하고 있었다.

그들의 수익 분배방법은 이른바 보합제(步合制)인 ‘짓가림제’라고 불리는 성과급으로 선장 이하 화부(火夫)에 이르기까지 미리 정해진 짓(몫)에 따라 어획물을 공동분배하는 형식이다. 이와 같은 보합제는 자본제적 기업 어업이 발달한 오늘날에도 어업 임금의 주종을 이루고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우리의 재래식 어업이 언제까지나 온존될 수는 없었다. 근대식 장비를 갖춘 일본 어선이 물밀 듯이 내침해 왔기 때문이다. 개항 이전까지는 주로 통어(通漁)와 이주라는 형태로 우리의 바다를 침범하던 일본 어선은 1883년(고종 20)의 ‘재조선국일본인민통상장정’과 1889년의 ‘한일통어장정’에 의하여 합법적인 어업권을 얻게 되자, 침탈은 바다에 그치지 않고 연안의 풍도(豊度) 높은 정치망어장과 유통과정까지 점탈하기에 이르렀다.

이와 같은 와중에서 우리 어업도 수동적이나마 개량된 어법 · 어구들을 도입하기 시작하였다. 우리 나라 바다에 동력어선이 최초로 등장한 것은 1909년경인데, 일본의 통어민이 고등어 · 삼치유망기선을 가지고 와서 조업한 것이 그 효시라고 할 수 있다. 그 뒤 잠시 중단된 듯하다가 1919년에 일본인들이 10척의 동력선을 도입하면서부터 급속히 증가하였다.

그러나 1920년까지는 일본인들의 독점물이었고, 그 이듬해에 비로소 우리 나라 사람이 1척의 동력어선을 도입하기에 이르렀다. 1929년의 경우 우리 나라 사람이 보유한 동력선은 149척인 데 비해, 이 해 일본인 소유 동력선은 673척이니 4.5배나 되는 셈이다. 이 무렵에 이르면 우리 나라의 어업경영형태에도 변화가 나타나 자본제적 경영이 출현하였다.

우리 나라에서 어업관계회사가 처음 설립된 것은 1888년 해산회사(海産會社)가 그 효시라고 하겠다. 이 회사는 1888년 10월 어업을 목적으로 자본금을 모집하여 회사를 설립하고, 일본에서 어채 기구를 구입해 와 새로운 어법을 시험한 뒤에 동남해연안에서 조업을 시작하였다. 이에 대하여 당시 정부에서도 적극적으로 지원했다고 전하고 있다.

해산회사는 다시 1890년 정월에는 포경업에도 진출하게 되었다. 그 당시 이 회사에 고용되어 있던 일본 어부는 256명, 임차된 어선은 22척이었으며, 우리 나라 주요 포구에는 모두 지사를 설치한 대수산회사로서 자본금이 수백만원에 달했다고 한다.

어업에서 회사형태의 출현은 생산과정에만 그치지 않았다. 그때까지 객주나 여각에 의해서 주로 유통되던 어물이 출고선(出賈船)에 의해 바다에서 직접 소비지 항구에까지 운반되자 어시장이 형성되었고, 그것을 경영하기 위하여 1903년 1월 자본금 60만 원으로 부산수산주식회사가 설립되었다. 그 뒤 마산 · 군산 · 인천에도 수산회사가 설립되었을 뿐 아니라, 1905년에는 소비지인 경성(京城)에도 주식회사 경성수산시장이 설립되었다.

이상과 같이 어업이 다양해지고 구조도 복잡해짐에 따라 그것을 규율하기 위한 법규가 정비되기 시작하였다. 우리 나라 최초의 근대적 어업법이라고 할 「한국어업법」이 제정된 것은 1908년이다. 이 법은 일제강점과 더불어 1911년에 「어업령」으로 바뀌고, 다시 1929년에는 크게 손질하여 「조선어업령」으로 개정되었다. 그러나 이들 어업법은 처음부터 일본인들에 의해서 제정, 개정된 것이므로 식민지적 성격을 배제할 수 없었다.

우리 손으로 민주적인 어업법을 만든 것은 1953년 「수산업법」이 제정된 이후이다. 요컨대, 한말의 어업은 일본식 어구 · 어선 · 자본 등 전반에 걸친 잠식의 과정이었고, 마침내는 법제정을 통하여 제도적으로 그것을 뒷받침하였다.

이와 같은 과정을 거친 일본의 어업과 자본은 합병과 더불어 바다는 물론, 항구와 내륙의 소비시장까지 완전히 장악하여 1912년 일본인의 어선은 5,653척이었으나, 어획고는 벌써 우리 나라 사람이 올린 어획고의 75.2%를 점하게 되고, 1928년에는 우리 나라 사람이 올린 그것보다 오히려 0.4%를 초과하는 3만 3119원에 달하고 있다. 그간에 수탈이 얼마나 심했나를 단적으로 말해 준다고 하겠다.

광복 이후 현황

광복 이후에는 일제의 식민지 통치의 후유증으로 나타난 산업의 일반적 침체, 국토의 남북 분단 등으로 말미암아 어업은 정체의 늪에 빠졌고, 이어 6·25전쟁, 사라호태풍 등의 치명적인 타격이 가해져 어업은 20년에 가까운 장기적 정체현상을 보였다.

1962년부터 착수된 경제개발5개년계획에서 동물성 단백질 식량의 주요 공급원으로서, 또 외화가득률이 높은 유리한 수출산업으로서 어업의 중요성에 주목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의 적극적인 개발정책을 강구하기 시작한 것이 계기가 되어, 1960년대 중기경부터 우리 나라 어업은 세계 어업사상 유례를 찾을 수 없을 정도의 급속한 발달을 거듭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어업의 급속한 신장 추세는 〈표 1〉의 어획량 추이에 집약적으로 반영되어 있다.

연도\구분 합계 연근해어업 원양어업 내수면어업
어획량 비율 어획량 비율 어획량 비율 어획량 비율
1962 451,447 100 449,895 99.7 657 0.1 895 0.2
1963 446,829 100 443,348 99.2 2,558 0.6 923 0.2
1964 526,900 100 522,260 99.1 2,605 0.5 2,035 0.4
1965 562,807 100 553,930 98.4 8,563 1.5 314 0.1
1966 611,210 100 584,021 95.5 26,852 4.4 337 0.1
1967 653,185 100 611,847 93.7 40,484 6.2 854 0.1
1968 739,238 100 688,078 93.1 50,074 6.8 1,086 0.1
1969 776,347 100 692,670 89.2 82,782 10.7 895 0.1
1970 816,233 100 726,231 89.0 89,782 11.0 381 0.1
1971 926,337 100 766,334 82.7 159,307 17.2 696 0.1
1972 1,183,136 100 957,898 81.0 224,135 18.9 1,103 0.1
1973 1,425,998 100 1,064,154 74.6 360,636 25.3 1,208 0.1
1974 1,685,897 100 1,266,541 75.1 418,380 24.8 976 0.1
1975 1,783,132 100 1,209,361 67.8 565,593 31.7 8,178 0.5
1976 1,995,756 100 1,256,980 63.0 724,260 36.3 14,516 0.7
1977 1,928,123 100 1,308,323 67.9 595,927 30.9 23,873 1.2
1978 1,960,690 100 1,363,402 69.5 566,223 28.9 31,065 1.6
1979 1,940,331 100 1,414,366 72.9 486,083 25.0 39,882 2.1
1980 1,868,788 100 1,372,347 73.4 458,209 24.5 38,232 2.1
1981 2,110,011 100 1,528,357 72.4 542,357 25.7 39,297 1.9
1982 2,046,876 100 1,475,387 72.1 527,819 25.8 43,670 2.1
1983 2,147,671 100 1,487,088 69.2 615,141 28.7 45,442 2.1
1984 2,230,014 100 1,523,117 68.3 658,252 29.5 48,645 2.2
1985 2,312,370 100 1,494,940 64.6 767,030 33.2 50,400 2.2
1986 2,707,485 100 1,725,820 63.7 929,886 33.4 51,779 1.9
1987 2,456,257 100 1,525,999 62.1 882,660 35.9 47,598 2.0
1988 2,311,402 100 1,512,481 65.4 774,240 33.5 24,681 1.1
1989 2,459,553 100 1,510,262 61.4 930,333 37.8 18,958 0.8
1990 2,485,938 100 1,542,013 62.0 925,331 37.2 18,594 0.7
1991 2,193,545 100 1,303.913 59.4 873,465 39.8 16,167 0.7
1992 2,333,451 100 1,295,396 55.5 1,023,926 43.9 14,129 0.6
1993 2,279,033 100 1,526,139 67.0 741,017 32.5 11,877 0.5
1994 2,383,596 100 1,486,357 62.4 887,198 37.2 10,041 0.4
1995 2,331,368 100 1,425,213 61.1 897,227 38.5 8,928 0.4
1996 2,347,084 100 1,623,822 69.2 715,378 30.5 7,884 0.3
1997 2,03,734 100 1,367,406 62.0 829,395 37.6 6,934 0.3
〈표 1〉 어획량 추이 (단위: M/T, %)
*자료: 수산통계연보(농수산부, 각 연도), 농림수산부통계연보(농림수산부, 각 연도).

광복 직후 수년간의 연간 어획량은 30만M/T 내외에 불과하였고, 6·25전쟁중에는 20만M/T대로 감소하기도 하였다. 그 이후 근 10년간에도 연간 어획량은 많아야 40만M/T을 약간 상회하는 데 그치고 있었다. 〈표 1〉에도 나타나 있는 바와 같이 1960년대 초에도 50만M/T에 미달하는 수준에 머물고 있었다.

그러나 수산업 개발정책의 효과가 발휘됨에 따라 어획고는 급증세 경향을 보이게 되어, 1964년에는 광복 이후 처음으로 50만M/T대를 돌파하였고, 1973년에 이르러서는 100만M/T대를 돌파하였다. 그리고 1986년에는 200만M/T에 육박하는 수준에까지 증가하였다.

이와 같은 어업의 급신장은 연근해어업의 발달에도 힘입은 바 컸으나, 가장 큰 원동력이 된 것은 어업의 활발한 원양 진출에 의한 원양 어획고의 경이적인 급증이었다. 우리 나라 원양어업이 본격적인 발달을 하게 된 계기는 1957년에 착수된 인도양 다랑어(참치) 연승어업시험이었다. 이 시험 조업이 성공을 거둠에 따라 남태평양 다랑어 연승어업이 개발되었고, 그것은 아침해가 떠오르는 것과 같은 기세로 발달하였다.

1966년에는 북태평양 트롤어업 시험 조업을 실시하여 성공을 거둠으로써 명태가 주요 어획대상인 북태평양어장이 개척되고, 이 어장에서의 대규모 트롤어업도 급속도로 발달하였다. 그리하여 1976년에는 북태평양에서 어획한 명태 어획량이 약 45만M/T에 달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1977년에 미국과 소련이 200해리 경제수역을 선포하고 주권적 권한이 미치는 관할 수역을 대폭 확장하는 바람에 북태평양 트롤어업은 큰 타격을 받았다. 이로 말미암아 한때 원양어업이 위축되고 총어획량이 감소되는 경향까지 보였으나 새로운 어장의 개척, 원양어업의 다각화 등을 통하여 원양어업은 다시 활기를 띠게 되었다.

1980년대에 들어서는 신흥 어업인 오징어채낚기어업을 비롯하여 다랑어선망어업 · 유자망어업 등의 발달로 원양어업 생산량이 다시 크게 증가하였다.

또 1987년에는 〈표 1〉에서 보는 바와 같이 원양 어획량이 총어획량의 약 36%나 차지하였다. 국제농업식량기구(FAO)의 수산통계에 의하면, 1966년의 우리 나라 어획량은 수산양식업 생산량을 포함하여 약 310만M/T으로 세계 제7위를 차지했던 것으로 되어 있다. 세계 상위권 수산국으로서 굳건한 위치를 굳히게 된 것이다. 그 견인차 역할을 한 것이 원양어업과 천해양식업, 특히 원양어업의 급격한 발달이었다.

당시 수산청에서는 4분법에 의해 어업을 연안어업 · 근해어업 · 원양어업 · 내수면어업으로 분류하고, 그 구체적인 종류를 행정적으로 정하고 있다. 그 종류와 근년의 경영체 수 또는 어선 수(내수면어업 제외)를 보면 〈표 2〉와 〈표 3〉과 〈표 4〉에 나타난 바와 같다.

어업별 \ 연도 1977 1982 1986 1987
연안어업 기선선이망 148 135 130 129
범선저인망 212 67 36 38
안강만 1,885 3,576 2,544 2,472
유자망 10,345 13,177 17,598 17,623
잠수기 273 273 273 271
정치망 673 694 704 705
외줄 낚시 3,299 3,300 4,540 4,719
주낙 5,085 7,706 10,140 10,380
제1종공동 1,147 1,578 1,681 1,708
제2종공동 97 91 16 60
제3종공동 794 910 1,020 1,002
기타 5,703 4,819 9,782 10,386
소계 29,661 36,326 48,509 49,493
근해어업 대형기선저인망 348 291 280 277
중형기선저인망 107 107 107 107
대형선망 33 48 48 48
동해구트롤 43 43 43 43
대형트롤 72 88 90 90
근해채낚시 1,208 1,266 1,283 1,263
소계 1,811 1,843 1,851 1,828
총계 31,472 54,757 50,360 51,321
〈표 2〉 연 · 근해어업의 경영체수
*자료 : 수산청.

어업별 \ 연 도 1984 1985 1986 1987
다랑어어업 237 231 242 269
독항연승어업 156 156 167 189
기지연승어업 69 64 61 60
선망어업 12 11 14 20
오징어어업 136 151 168 207
유자망어업 117 98 117 140
채낚기어업 19 53 51 67
트롤어업 233 229 235 232
독항트롤어업 43 45 44 43
기지트롤어업 83 75 96 96
새우트롤어업 107 109 95 93
기타어업 8 6 8 4
614 617 653 712
〈표 3〉 원양어업의 어선 척수
*주 : 기타 어업은 가다랭이채낚기·상어유자망·다랑어유자망어업 등 임.
* 자료 : 수산청.

총계 동력선척수 무동력선척수
원양어업 637 637 -
저인망 1,625 1,620 5
선망 591 569 22
부망 1,617 1507 110
유자망 17,437 16,396 1,041
인망 610 601 -
낚시 7,891 6,739 1,152
연승 13,979 13,221 758
통발 9,277 9,042 235
정치망 555 435 120
기타 어업 2,836 1,457 1,379
양식업 19,162 18,137 1,025
내수면 2,558 1,855 703
기타 2,225 1,555 670
〈표 4〉 업종별 어선수

연안어업의 종류는 아주 많으나 여기에서는 그 가운데 중요한 것만 그 명칭을 밝히고 나머지 잡다한 소규모 어업은 기타 어업에 포함시키고 있다. 연안어업과 근해어업을 합한 연근해어업의 경영체 수는 1987년에는 증가 추세를 보이지 않고 있으며, 원양어업 어선은 증가 추세를 보이고 있다.

연근해어업도 그 생산량이 최근에 이르러서는 1960년대 초에 비해 3배 내외로 증가하였다. 이를 연안어업과 근해어업으로 분리해 보면 근해어업이 보다 빠른 속도로 발달했던 사실이 다른 통계에 밝혀져 있다. 연안어장은 개발의 역사가 길어 노후된 반면 근해어장은 보다 진출 여지가 많고 어장의 풍도(豊度)가 상대적으로 높았기 때문이다.

내수면어업은 뒤늦기는 했으나 적극적인 내수면어업 개발정책이 추진됨으로써 주목을 끌 정도로 생산량이 증가되고 있는 중이다. 그러나 총어획량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아직도 2% 내외에 불과한 단계에 머물고 있다.

1983년의 경우 우리 나라의 호당 평균 어업수입은 약 539만 원인데, 그 중 어로어업에서 얻은 수입은 약 433만 원이었고, 양식업에서 얻은 수입은 약 94만 원이었다. 1987년의 경우 호당 평균 어업수입은 약 757만 원인데, 그 중 어로어업에서 얻은 수입은 약 589만 원이었고, 양식업에서 얻은 수입은 약 154만 원이었다. 한편, 1983년의 호당 평균 어로수입은 약 734만 원인데, 어가지출이 약 325만 원이므로 어가소득은 약 409만 원이었다.

1987년의 경우 호당 평균 어가수입은 약 1117만 원이었는데 어가지출이 약 500만 원이므로 어가소득은 약 617만 원이었다. 1995년 말 우리 나라의 호당 평균 어로수입은 약 718만 원인데, 그 중 어로어업이 약 1174만 원이고, 양식업에서 얻는 수입은 약 390만 원이다. 한편, 1995년의 호당 평균 어가수입은 약 3021만 원, 어가지출은 약 1143만 원이므로 어가소득은 약 188만 원이었다.

내수면어업

내수면어업은 주로 하천어업이나 지방에 따라서는 호수어업이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경우도 있다. 1975년 12월 31일에 공포된 「내수면어업개발촉진법」 제3조의 정의에서 “내수면이라 함은 하천 · 댐 · 호소(湖沼) · 저수지 및 기타 인공으로 조성된 담수나 기수(汽水)의 수류(水流) 또는 수면을 말한다.”고 하여 내수면에 속하는 수계를 총망라해서 열거하고 있다. 따라서 해면에 속하지 않는 수계(水界)는 모두 내수면에 속하게 된다.

내수면어업을 담수어업(淡水漁業)과 동의어로 해석하는 경향이 있으나 둘이 꼭 같은 것은 아니다. 어구 · 어법과 어선이 발달하지 못했던 원시시대에는 내수면어업의 중요성이 컸으나 해면어업이 발달됨에 따라 그 중요성은 점차 감소되었다. 오늘날 내수면어업은 해면어업과 마찬가지로 법제상으로는 면허어업 · 허가어업 및 신고어업으로 나누어져 있다.

「내수면어업개발촉진법」 제7조에 도지사의 면허를 받아야 하는 면허 어업은 양식어업 · 정치어업 · 공동어업 · 조류채취업으로 되어 있고, 도지사의 허가를 받아야 하는 허가 어업은 제8조에 자망어업 · 투망어업 · 채묘(採苗) · 채포어업 · 주낙어업 · 어전어업 · 패류채취어업 · 낚시업으로 규정되어 있다. 신고어업은 제9조에 앞에서 든 것 이외의 것들로 되어 있다.

오늘날 내수면어업의 주요 어획대상은 붕어 · 미꾸라지 · 잉어 등이고, 이 밖에 메기 · 가물치 · 뱀장어 · 숭어 · 웅어 · 쏘가리 · 은어 · 황어 · 빙어 등도 내수면에서 잡고 있으나 그 어획량은 근소한 상태에 있다.

1983년의 내수면어업 어획고는 4만 5442M/T에 금액으로는 약 666억 원이었다. 수량은 그 해 총어획량 약 279만 톤의 약 1.6%에 그쳤으나 금액은 총어획 금액 약 1조 3944억 원의 거의 5%에 해당하는 것으로 보아 내수면에서는 고가의 수산물이 어획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987년의 경우 내수면어업에서 얻은 총생산량은 5만 7103M/T, 금액은 약 1114억 원에 이르렀다.

1995년 말에는 내수면어업에서 얻은 총생산량은 2만 9293M/T, 금액은 액 142억 5000만 원이었다.

전망

우리 나라 어업은 1960년대 중기를 분수령으로 정체기에서 발전기로 전환하여 세계 어업사상 특기할 만한 고도성장을 이룩하였다. 그리하여 어업개발에서 우리 민족의 탁월한 역량을 과시할 수 있었다.

그러나 과연 앞으로도 고도성장이 지속적으로 달성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문제를 생각해볼 때는 그 전망이 낙관적이라고만은 하기 어렵다. 원양어업은 온갖 난관을 극복하면서 발달하였으며, 아직도 그 발달 속도를 늦추지 않고 있기는 하나, 오늘날 원양어업을 둘러싼 국제환경은 냉엄하기만 하다. 미국을 위시한 여러 연안국들의 자국 관할 수역 내에서의 어업에 대한 규제는 더욱 강화되고 있으며, 입어료(入漁料)도 계속 인상되고 있다.

바야흐로 ‘연안에서 근해로, 근해에서 원양으로’라는 어업의 외연적 확장 일변도 경사 경행을 보였던 어업정책이 재고되어야 할 시점에 이른 것이다. 충분하고 보다 안정적인 어획물 공급의 주요 원천을 우리 나라의 연근해에서 찾지 않으면 안 될 날이 그렇게 멀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날에 대비하여 연근해 자원을 보호하고 육성하는 데 보다 높은 정책적 우선 순위가 부여되어야 할 때에 이른 것이다.

자율재생적 어업 자원은 적정한 어획 노력을 투입하여 자원량을 적정 수준으로 유지하면 지속적 생산이 최대가 되는 지속적 최대 생산 또는 경제적 요소를 고려한 순경제적 최대 생산을 달성하면서 이용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대부분의 연근해어업에서 어획 노력의 과잉 투자현상이 발생하여 보다 많은 어획 노력을 투하하나 더 적은 지속적 어획량을 실현하는 악순환과정이 되풀이됨으로써 자원 고갈현상과 경제적 낭비현상이 동시에 일어나고 있다. 국민소득 수준의 향상에 따라 소득 탄성치가 높은 고급 어에서 그러한 현상이 보다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어장 환경을 개선하고 인공적 자원 증식을 통한 자원의 보호 · 조성과 함께 합리적 어업관리도 병행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참고문헌

『농림수산통계연보』(농림수산부, 1998)
『현대한국수산업사』(수우회, 1987)
『한국어업경제사연구』(박광순, 유풍출판사, 1981)
『한국어업사』(박구병, 정음사, 1975)
『한국수산사』(수산청, 1968)
『한국수산업사』(박구병, 태화출판사, 19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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