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인 오페르트(Oppert,E.J., 載拔)는 1866년 3월과 8월 두 차례에 걸친 조선과의 통상교섭에 실패하자 기회를 노리다가, 병인사옥 때 탈출하여 프랑스 제독 로스의 강화도 침범 당시 향토 및 수로 안내인 역할을 했던 프랑스 신부 페롱(Feron)과 조선인 천주교도와 함께, 흥선대원군의 아버지인 남연군 구(球)의 묘를 발굴해 시체와 부장품을 이용하여 대원군과 통상문제를 흥정하고자 하였다.
이에 오페르트는 배후인물로 자금을 전담하였던 미국인 젠킨스(Jenkins,F.), 페롱, 선장 묄러(Moeller), 조선인 모리배 2명, 유럽 · 필리핀 · 중국선원 등 총 140명으로 도굴단을 구성하였던 것이다.
오페르트 일행은 1868년 5월 차이나호(China號) · 그레타호(Greta號) 등 1천 톤급 기선 두 척을 이끌고 일본 나가사키(長崎)에서 머스킷소총과 도굴용 도구를 구입한 다음, 그 달 10일 충청남도 덕산군 구만포에 상륙하여 아라사인이라 사칭하면서 남연군 묘로 행군하였다.
도굴단은 덕산군청을 습격해 군기를 탈취하고, 민가로부터 발굴도구를 약탈하여 가동(伽洞)의 남연군 묘로 직행, 밤에 도굴에 착수하였으나 묘광이 견고하여 실패하고, 날이 밝아오자 철수하였다.
오페르트는 돌아오는 길에 인천 영종도에 들러서 프랑스제독 알리망(Allemagne, 亞里莽)의 명의로 “귀국의 안위는 존하(尊駕)의 처단에 달렸으니 대관을 파견 교섭하자.”라는 내용의 글을 흥선대원군에게 전해달라고 하였으나, 영종첨사 신효철(申孝哲)은 도굴행위의 만행을 규탄하고 양이(洋夷)와는 성기(聲氣)가 통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글을 되돌려주었다.
이 사건으로 젠킨스는 미국인에 의하여 고발당하였고, 페롱은 프랑스 정부로부터 소환당하였다. 이 사건으로 흥선대원군은 서양과의 통상에 대해 더욱 부정적이 되었다고 한다.
결국 대외적으로는 서양인의 위신이 떨어졌고, 대내적으로는 대원군의 쇄국양이정책의 강화와 천주교탄압이 가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