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6년 12월 11일 경상북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현포리는 울릉도의 북안 서쪽에 위치한다. 이 고분군은 울릉도 주봉인 성인봉의 주능선에서 북쪽으로 뻗어내린 지릉의 말단부인 완만한 경사면에 분포하고 있다.
현재 이 고분군은 경사면을 개간하면서 많이 파괴되고 잔해만 남아 있다. 또 동편에는 현포초등학교가 건립되면서 많이 유실되었다. 그리고 이 고분군이 있는 주변에서는 절터〔寺址〕가 조사되어 울릉도에서 이곳의 역사적 위치를 짐작케 해준다.
현포동고분군은 1957년국립박물관에 의해서 조사되었다. 조사보고서에서는 산중턱에 5기, 해안 가까이의 동쪽과 서쪽으로 크게 나뉘어 각각 10여 기와 20여 기가 군집을 이뤄 3개의 군집으로 분포하였고, 모두 38기 정도가 남아 있었다고 하였다. 그러나 지금은 약 10기의 고분이 남아 있으며 국립중앙박물관의 발굴조사 때 5기가 정식으로 조사되었다.
조사된 고분은 대체로 직경 10∼15m, 높이 5m 내외인 타원형 평면형태인 돌무지무덤〔積石塚〕이다. 내부구조는 앞트기식 돌덧널〔橫口式石槨〕으로, 돌덧널은 지상에 축대를 쌓아 기단(基段)으로 삼고, 그 위에 축조되었다. 평면형태는 중앙의 배가 부른 장방형이다. 이 돌덧널의 위에 괴석을 쌓아 분구를 완성한 특이한 구조이다.
천장은 다수의 편평한 돌을 연결해 덮었다. 벽은 위로 올라가며 좁게 쌓았고, 경사지의 낮은 쪽에 입구를 두었다. 입구를 막은 흔적은 남아 있지는 않았지만 원래는 폐쇄했던 것으로 보인다.
돌덧널의 바닥에는 아무런 시설을 하지 않은 것들도 있으나 잡석을 한 벌 깔아 주검받침〔屍床〕으로 삼은 것들도 있었다. 여러 가지 남아 있는 현상을 통해 볼 때, 그리고 함께 조사된 천부동의 한 고분(제2호분)의 경우로 보아, 합장(合葬)이 실시된 것으로 보인다.
돌덧널 내의 유물은 모두 도굴되고, 은고리〔銀環〕·쇠삽〔鐵鍤〕·쇠도끼 등의 금속유물과 도장무늬토기〔印花文土器〕·병모양토기〔甁形土器〕등의 통일신라시대 토기들이 출토되었다. 출토된 토기의 양식은 통일신라시대의 후기에 속한다.
이 고분군 가운데 가장 잘 남아 있는 것은 10-1호로 지정된 고분이다. 10-1호분은 바다를 향한 사면에 큰 냇돌과 깬돌을 쌓아올려 축대를 쌓고 그것을 바닥으로 하여 앞트기식돌방〔橫口式石室〕을 만들면서 돌을 쌓아올리고, 돌방 위에 장대석 12매를 걸쳐 뚜껑으로 하고 그 위에까지 돌을 쌓아 봉분을 완성한 전형적인 울릉도식의 돌무지무덤이다.
돌무지로 된 봉분은 사다리꼴이며 높이는 2.5m 정도이다. 돌방 입구의 크기는 너비 1.26m, 높이 0.86m로 서단벽의 전면을 사용하였다. 돌방의 내부는 길이 9.1m, 중앙부 최대 너비 1.8m, 중앙부 최고 높이 1.87m이며 양 단벽쪽으로 가며 너비도 좁아지고 높이도 낮아진다. 평면상으로 후벽의 양쪽모서리는 모줄임처리하였으며, 후벽에서 천장의 전체형태는 활등처럼 굽은 모양〔弧狀〕을 이룬다.
돌방의 양 장벽은 깬돌과 냇돌을 섞어 5단 정도 쌓았고, 바닥에는 깬돌을 깔았다. 고분들의 사이사이와 그 주변 넓은 지역에서는 삼국시대와 통일신라시대의 유물이 많이 채집되고 있다. 채집되는 유물은 신라토기인 굽다리접시조각, 굽다리조각, 병조각, 손잡이조각, 바리조각, 항아리조각 등과 울릉도 현지에서 제작한 것으로 보이는 적갈색의 연질토기조각, 그물추 등이다. 이러한 유물들은 이곳에 대규모 취락이 들어서 있었으나 그곳이 경작지로 바뀌면서 파괴되어 흩어진 것을 보여준다.
이 고분군의 중앙부 바닷가 가까이에는 4개의 돌기둥이 세워져 있어 절터로 추정되고 있는데, 이곳의 일부를 영남대학교박물관에서 시굴조사하였다. 돌기둥이 세워졌던 구덩이가 2열 3개씩 확인되었고, 하나의 열 중앙에서는 돌기둥 대신 나무기둥을 꽂도록 만들어진 석확형의 구조물이 발견되었다. 이 돌기둥열들과 남아 있는 돌기둥을 연결하여 보면 모두 3열이고 1열 5개인 돌기둥열이 되는데, 주변을 더 조사하면 보다 많은 돌기둥들이 확인될 것으로 보인다.
현포동고분군에서 발견된 돌기둥열 유구는 국내에서 발견된 예가 없는 것으로 의례나 제의를 위한 시설물로 추정할 수 있다. 그리고 이 돌기둥들은 함께 출토되는 토기조각들로 보아 통일신라시대에 축조된 것으로 판단된다. 즉, 새끼무늬〔繩文〕가 타날(打捺)된 토기가 출토되는 점으로 보아, 이 고분군 전체의 조성연대는 7∼10세기에 해당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고분의 수나 크기, 돌기둥열 유구, 유물산포지의 범위 등으로 미루어 현포동고분군은 삼국시대∼통일신라시대에 걸쳐 울릉도의 중심지 역할을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즉, 육지에서 울릉도로 들어갈 때 이 유적이 있는 곳이 기착지 역할을 하면서 울릉도에 들어오는 내륙의 물품을 분배하는 장소로 활용되었을 개연성이 크다. 이 고분군은 그러한 이권을 장악한 정치세력 집단이 이곳에 자리잡고 활동했음을 알려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