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기계(杞溪). 자는 강지(絳之). 증참판 유해(兪解)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첨지중추부사 유기창(兪起昌)이다. 아버지는 예조판서 유여림(兪汝霖)이며, 어머니는 창녕성씨(昌寧成氏)로, 증판서 성담명(成聃命)의 딸이다.
1531년(중종 26)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었다. 1541년(중종 36)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승문원부정자(承文院正字)에 등용되고, 주서(注書)를 거쳐 1551년(명종 6) 집의(執義)가 되었다.
이듬해 전한(典翰)에 이어 직제학(直提學)·동부승지를 역임하고, 1554년 전라도관찰사, 1555년 대사간, 1557년 대사헌이 되었다. 이듬해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로 사은사(謝恩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와 평안도관찰사가 되었다. 그뒤 특진관(特進官)·병조참판을 거쳐 도승지·한성부판윤·공조판서·호조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인품이 관후하고 인자하였으나, 관직에 있으면서 일을 처리할 때에는 매우 엄하여 자연히 탐관오리들의 비행이 없어지게 되었다.
특히, 평안도관찰사로 있을 때에는 인재를 모아 가르쳐서 문풍(文風)을 크게 일으켜, 관서지방의 유생들이 중앙에 진출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으며, 문하에 많은 제자를 배출하였다.
호조판서로 있을 때에는 국고의 절약에 힘써, 비록 권귀(權貴)라 할지라도 사정(私情)을 두지 않고 법대로 처리하였다. 묘는 양주 차유령(車踰嶺)에 있다. 시호는 숙민(肅敏)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