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고흥(高興). 자는 응문(應文), 호는 어우당(於于堂)·간재(艮齋)·묵호자(默好子). 유의(柳依)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사간 유충관(柳忠寬)이다. 아버지는 주부(主簿) 유탱(柳樘)이며, 어머니는 참봉 민의(閔禕)의 딸이다.
성혼(成渾)과 신호(申濩)에게서 수학했으나 경박하다는 책망을 받고 쫓겨나, 성혼과는 사이가 좋지 못하였다. 1582년(선조 15) 진사가 되고, 1589년 증광 문과에 장원 급제하였다. 1592년 수찬으로 명나라에 질정관(質正官)으로 다녀오다가, 임진왜란이 일어나 선조를 평양까지 호종하였다.
왜란 중 문안사(問安使) 등 대명 외교를 맡았으며 세자의 분조(分朝: 임란 당시 세자를 중심으로 한 임시 조정)에도 따라가 활약하였다. 그 뒤 병조참의·황해감사·도승지 등을 지내고, 1609년(광해군 1) 성절사 겸 사은사로 세 번째 명나라에 다녀왔다. 그 뒤 벼슬에 뜻을 버리고 고향에 은거하다가 왕이 불러 남원부사로 나갔다.
그 뒤 한성부좌윤·대사간 등을 지냈으나, 폐모론이 일어났을 때 여기에 가담하지 않고 도봉산 등에 은거하며 성안에 발을 들여놓지 않았다. 이에 따라 1623년 인조반정 때 화를 면했으나, 관직에서 물러나 방랑 생활을 하였다.
그 해 7월 현령 유응경(柳應泂)이 “유몽인이 광해군의 복위 음모를 꾸민다.”고 무고해 국문을 받았다. 마침내 역률(逆律)로 다스려져 아들 유약(柳瀹)과 함께 사형되었다. 서인들이 중북파(中北派)라 부르며 끝내 반대 세력으로 몰아 죽인 것이었다. 이 때 관작의 추탈은 물론 임진왜란의 공으로 봉해진 영양군(瀛陽君)의 봉호도 삭탈되었다. 정조 때 신원되고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조선 중기의 문장가 또는 외교가로 이름을 떨쳤으며 전서(篆書)·예서·해서·초서에 모두 뛰어났다. 유몽인의 청명(淸名)을 기려, 전라도 유생들이 문청(文淸)이라는 사시(私諡: 개인의 시호를 국가에서가 아닌 사적인 방법으로 내림.)를 올리고 운곡사(雲谷祠)에 봉향하였다.
신원된 뒤에 나라에서도 다시 의정(義貞)이라는 시호를 내리고 운곡사를 공인하였다. 고산(高山)의 삼현영당(三賢影堂)에도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야담을 집대성한 『어우야담』과 시문집 『어우집』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