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기계(杞溪). 자는 자수(子修), 호는 우곡(愚谷)·요곡(拗谷). 유강(兪絳)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유영(兪泳)이다. 아버지는 선무랑 유대의(兪大儀)이며, 어머니는 이승서(李承緖)의 딸이다.
1610년(광해군 2)에 사마시를 거쳐, 1619년 별시문과에 장원급제하여 예조좌랑이 되었으나 대북파를 싫어하여 사직하고, 조도사(調度使) 이창정(李昌庭)의 막하가 되었다. 호조좌랑으로 있을 때 아우 유세증(兪世曾)이 이이첨(李爾瞻)과 가까이하여 괴롭혔으나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이때 영남 유생들이 이이첨을 논책하는 상소를 하였는데, 상소문을 써준 탓으로 투옥당하였다.
한달 후에 신병으로 출옥하였으며, 1623년에 인조반정으로 용서를 받았다. 1627년(인조 5) 정묘호란 때 지평으로 인조를 강화에 호종하고 척화를 주장하였다. 그 뒤 집의로 있을 때에는 호란 후의 수습책으로 양전(量田)의 실시, 대동법(大同法)의 실시, 부역의 공평부과, 절행(節行)의 표창 등을 건의하기도 하였다.
그 뒤 장령·수찬·사간·동부승지 등을 역임하였다. 1636년 병자호란 때에는 강화로 들어가 파수대장(把守大將)으로 활약하였으며, 승지에 임명되었으나 사퇴하고 뒤에 강원도관찰사·예조참의 등을 지냈다.
사람됨이 돈후하고 충신하여 장자(長者)의 풍모를 갖추었으며, 논의(論議)를 즐겨하지 않았다. 인심을 수습하여 하늘의 재앙을 막는 것에 뜻을 두어 지방에 결원이 있을 때에는 반드시 물망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