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신백(藎伯), 호는 금사(錦沙). 관찰사 유진동(柳辰仝)의 증손으로, 아버지는 통제사 유형(柳珩)이다.
1613년(광해군 5) 정조(鄭造)·윤인(尹訒) 등이 인목대비(仁穆大妃)의 폐모론을 주장하자 그들의 죄를 강경히 탄핵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처벌을 당하였다.
1618년 진사시에 합격하고, 이 해 인목대비를 폐하여 서인으로 강등시켜 서궁(西宮)에 유폐하자 이에 분개하여 대과를 단념하고 공주에 은거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 후 비로소 벼슬에 나갔고,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 때에는 사재감직장(司宰監直長)으로 있으면서 의병을 모집하여 남한산성으로 향하였으나 화의 성립으로 의병을 해산하였다.
그 뒤 세자익위사익위(世子翊衛司翊衛)를 거쳐, 현감을 지냈다. 청나라와 화의가 성립된 뒤에 설욕책을 상소하였는데, 세자사부로 있던 이유태(李惟泰)는 유충걸의 상소문을 읽고 충의심에 감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