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익산(益山). 자는 남촌(南村). 할아버지는 언부전서(讞部典書) 이행검(李行儉)이고 아버지는 감찰규정 이애(李崖)이다.
일찍 어머니를 여의고 자부(姉夫)인 전공의(全公義) 집에서 자랐다. 1340년(충혜 복위 1) 감찰규정(監察糾正)으로 있으면서 과거에 급제해 이듬해 전의주부(典儀注簿)·성균관직강(成均館直講)이 되었다. 1342년에 성균사예(成均司藝)·예문응교(藝文應敎)·지제교(知製敎), 이듬해에 전교부령(典校副令)·춘추관수찬관(春秋館修撰官)에 올랐다.
1344년(충목 즉위년) 6월 서연관(書筵官)이 설치되면서 우부대언(右副代言)으로 왕을 시강(侍講)했고, 다음해 1월 지신사(知申事)로서 찬성사(贊成事) 박충좌(朴忠佐)·김영후(金永煦), 참리(參理) 신예(辛裔)와 함께 정방(政房)의 제조관(提調官)에 임명되었다.
이후 1345년 지신사·전리판서(典里判書), 1347년 밀직부사를 거쳐 이듬해 정월 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에 임명되었으며, 4월 성절사(聖節使: 황제나 황후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보내는 사신)로 원나라에 다녀왔다. 1350년(충정 2) 정당문학(政堂文學) 등을 역임했으며, 공민왕(恭愍王) 때 삼사우사(三司右使)를 거쳐 1352년 첨의평리(僉議評理)에 임명되어 찬성사에 올랐다. 정동행성(征東行省)의 도사(都事)에 제수되었으나 사양해 익산부원군(益山府院君)에 봉하였다.
1361년(공민 10) 11월 홍건적이 침입하자 평장사(平章事)로 죽전(竹田)에 나아가 진을 쳤으나, 적이 개경을 압박하자 다시 돌아와 왕을 따라 남행(南幸)하였다. 이듬해 3월 홍건적이 평정되자 참정 황상(黃裳)·추밀원사 김희조(金希祖)와 같이 개경을 지켰다. 1362년 6월 찬성사에 임명되고, 판판도사사(判版圖司事) 예문관대제학(藝文館大提學) 지춘추관(知春秋館)으로 승진하였다. 공이 명을 받고 와서 재주를 헤아려 관직을 맡기고 방략(方略)을 지시해 유민을 편안히 안정시키며 생도를 가르치고 길렀다.
1363년 3월 원나라에서 공민왕을 폐위하고 덕흥군(德興君)을 왕으로 세우자, 밀직제학(密直提學) 허강(許綱)과 함께 진정표(陳情表)를 가지고 가서 공민왕의 복위를 위해 노력했으나 뜻을 이루지는 못했다. 그는 덕흥군을 따라 고려로 가지 않고 태상예의원사(太常禮儀院使)로서 그대로 원나라에 머물렀다.
이해 4월 본국으로부터 좌정승에 임명되었지만 얼마 안 되어 덕흥군의 우정승에 임명되었다는 통역관 이득춘(李得春)의 무고로 5월 파직되었다. 1364년 원나라 병사 1만 명과 함께 덕흥군을 받들고 귀국하던 최유(崔濡)가 고려의 군사에게 대패한 뒤, 또 다시 대병력을 이끌고 고려로 들어가려 하였다.
이때 홍순(洪淳)·허강·이자송(李子松)·김유(金庾)·황대두(黃大豆)·장자온(張子溫)·임박(林樸) 등과 함께 그 사실을 밀서로 꾸며 정량(鄭良)·송원(宋元)으로 하여금 본국에 보고하게 하였다. 그 결과 과거 이공수에 대한 이득춘의 참소가 사실과 다른 것으로 밝혀져 1364년 10월 영도첨의(領都僉議)에 제수되고, 추충수의동덕찬화공신(推忠守義同德贊化功臣)이라는 호를 받았다.
이해 공민왕의 왕위가 회복되자 본국으로 돌아왔는데 국학(國學)을 수리하는 것을 보고 기뻐하여 원나라 황제에게서 받은 금대(金帶)를 풀어 그 비용에 충당하도록 했다. 이때 정권을 잡은 신돈(辛旽)이 시기하자 관직에서 물러나 덕수현(德水縣)의 농장으로 내려가 남촌선생(南村先生)이라 자칭하고 한가롭게 지냈다. 1365년 6월 익산부원군에 봉해졌고, 이듬해 5월 세상을 떠났다. 성품이 깨끗해 작은 것이라도 함부로 주고받지 않았으며, 일에 임할 때는 강하고 의연해 형세에 어려워하는 것이 없었다.
1376년(우왕 2) 공민왕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