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광주(廣州)이다. 자는 겸보(謙甫), 호는 우봉(牛峰). 이집(李集)의 증손이며, 할아버지는 이지직(李之直)이다. 아버지는 우의정 이인손(李仁孫)이며, 어머니는 노신(盧信)의 딸이다.
1447년(세종 29) 사마시에 합격해 진사가 되었으며, 그 해 식년문과에 정과로 급제하였다. 처음에는 승문원부정자로 보임되었고 이어 감찰이 되었으며, 검찰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그 뒤 정언·지제교가 되었다. 얼마 뒤에 지난번 명나라에 갔을 때 검찰직을 잘 수행한 것으로 평가되어 병조 겸 좌랑이 되었다가 정랑으로 승진하였다.
세조가 즉위하는 데 공이 인정되어 좌익공신(佐翼功臣) 3등에 녹훈되었다. 1457년(세조 3)에는 예조참의 겸 경상도관찰사에 임명되었다. 이어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승자되어 광릉군(廣陵君)에 봉해졌다.
그 뒤 병조참판과 예조참판 겸 집현전제학을 거쳤다. 1459년에는 북변의 야인 정벌 때 신숙주(申叔舟)의 종사로 출전했고, 돌아와서는 경기도관찰사가 되었다.
1462년 이래 호조·공조를 제외한 4조의 판서를 두루 역임하였다. 외직으로는 평안도절도사가 되어 변방의 어수선한 인심을 잘 무마했다. 그 공으로 정헌대부(正憲大夫)로 품계가 올라 평안도관찰사가 되었다. 예종 때는 우참찬이 되었다. 1471년(성종 2)에는 좌리공신(佐理功臣)으로 책훈되고 판중추부사가 되었다.
1479년에는 보국숭록대부(輔國崇錄大夫)에 올라 영중추부사가 되었다. 1481년부터 2년 동안 대기근이 일어나자 진휼사(賑恤使)로 활약하고, 겸판호조사(兼判戶曹事)가 되었다. 1485년에 우의정이 되었다. 1493년에 영의정에 제수되었으나 노병을 구실로 사양했다. 다시 광릉부원군(廣陵府院君)에 봉해졌다.
이극배는 기국과 도량이 크고 깊으며 뜻과 생각이 견고했다. 경학으로 근본을 삼았고 행정 재능도 겸비하였다. 오래 정치권력을 손에 쥐고 있으면서도 사사로이 손님을 맞지 않았으며, 가무(歌舞)는 그릇된 것으로 여겼다. 나라의 일을 의논할 때는 대체적인 것에 힘쓰고, 세세한 것은 거론하지 않았다. 시호는 익평(翼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