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영천(永川). 자는 인지(引之). 영천 출신. 이윤경(李允卿)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이양실(李陽實)이다. 아버지는 이두만(李斗萬)이며, 어머니는 이사의(李思義)의 딸이다.
1417년(태종 17) 생원시에 합격하고, 1420년(세종 2)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주서가 되고, 이조·병조의 정랑을 역임하였다.
1433년 대장 최윤덕(崔閏德)의 종사관으로 북변(北邊)의 이만주(李滿住) 정벌에 공을 세우고 돌아와 사인(舍人)에 올랐다.
1438년 집의로 발탁, 지형조사(知刑曹事)·지병조사(知兵曹事) 등을 겸임하였다. 1440년 첨지중추부사를 역임하고 우부승지·좌승지가 되었으며, 1443년 다시 도승지로 승진하였다. 1445년 이조참판, 이듬해에는 인순부윤(仁順府尹), 1447년 병조참판, 1448년 형조판서, 1449년 대사헌에 제수되었다.
한때 노비의 소송사건으로 파직되었으나, 1451년(문종 1)에 다시 예조판서에 제수되었다. 1453년(단종 1) 이조정랑 당시의 부정사건과 불교를 신봉하였다는 이유로 대간의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다.
문종이 죽자 국장도감제조(國葬都監提調)가 되었고, 세조가 즉위하자 좌익원종공신(佐翼原從功臣)에 녹훈되었다. 1456년(세조 2)에 경기관찰사가 되었고, 1457년 예조판서·호조판서를 지냈다. 뒤에 판한성부사로 있다가 1459년 좌참찬에 임명되었는데 품계는 숭록대부(崇祿大夫)가 되었다.
1460년 경상도·전라도·충청도의 도민(道民)을 평안도·강원도·황해도에 이민시키는 일을 관장하였다. 1463년 우찬성에 올랐다. 시호는 성정(成靖)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