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장흥(長興). 아버지는 임희성(任希聖)이다. 1568년(선조 1) 사마시에 합격하였으나 그 뒤 뜻을 바꾸어 무과를 지망하였는데 평소 그의 이름을 알고 있던 시험관이 원서를 받아주지 않자 왕에게 소를 올렸고 왕은 그 뜻을 기특하게 여겨 선전관으로 특채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 때에는 종묘서령(宗廟署令)으로서 두 손으로 종묘의 신주(神主)를 받들어 모시고 왕을 의주까지 따라가니 왕이 크게 감격하여 손을 잡고 위로하였으며, 그날로 무과를 보게 하니 그 무과는 오로지 그를 위한 것이었다.
여기서 무과에 급제한 뒤 안주목사가 되고 이듬해에는 운량사(運糧使)로 군량수송에 공을 세웠다. 1604년 공신을 책정할 때에는 이미 사망한 뒤였으나 호성공신(扈聖功臣) 3등으로 책정되어 예양군(汭陽君)에 추봉되고 형조판서에 추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