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한상(張漢相)의 본관은 순천(順天)이며 자는 필경(弼卿), 호는 운암(雲巖). 증조는 장덕명(張德明), 조부는 장익(張翊)이다. 아버지는 경기도 수군절도사를 지낸 장시규(張是奎), 어머니는 진성 이씨(眞城 李氏)다.
장한상은 의성의 비안현에서 출생하였는데 부친의 무인 기질을 이어받았다. 1676년(숙종 2) 무과에 급제하였고 선전관을 거쳐 1682년(숙종 8) 훈련원 부정 재직 시 통신사의 일원으로 일본에 다녀왔다. 이후 경상좌도 병마절도사에 임명되었으나 탐학하다는 죄를 얻어 파직되었다.
1694년(숙종 20) 삼척영장 겸 울릉도 수토관으로 울릉도 지역을 조사하였다. 당시는 안용복 사건 등 지금의 울릉도 · 독도 일대를 둘러싸고 일본과 갈등을 겪던 시기였다. 재상 남구만(南九萬)은 숙종에게 울릉도에 대한 국가적인 차원의 조사를 건의하였고, 삼척영장이었던 장한상이 이를 수행하였는데, 1694년 9월에 출항해 울릉도 일대를 조사한 후 10월에 귀항하였다.
장한상의 수토를 시작으로 이후 한 말까지 울릉도에 대한 정기적 수토가 시행되었다. 장한상이 수토한 자료는 현재 울릉도에 대한 역사 연구뿐 만 아니라 독도의 영유권 수호에 있어서도 중요한 가치를 갖는다.
한편, 장한상은 1712년(숙종 38) 청나라와 국정을 획정할 때 함경북도 병마절도사로서 백두산 남쪽 지형을 그려 바친 바도 있다. 1716년(숙종 42) 경기도 수군절도사, 영변부사, 1723년(경종 3) 다시 함경도 병마절도사, 황해도 병마절도사 등을 지냈다.
장한상은 백두산 정계 과정에서 직접 탐사하지 않고 보고하거나 백성들에게 뇌물을 받고 정치를 한다는 명목으로 탄핵을 당하기도 하였으나, 일본인들로부터는 장한상 같은 사람 몇 명만 있으면 대국도 감히 모욕하지 못할 것이라는 평가를 듣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