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영일(迎日). 자는 중경(重卿), 호는 창대(昌臺). 영천 출신. 아버지는 정용(鄭容)이며, 어머니는 증참판 김응생(金應生)의 딸이다. 종조부 정윤식(鄭允湜)에게 수학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모아 당지산(唐旨山)에서 복병으로 적을 크게 무찌르고 이어 7월에 영천지역 의병 수백 명을 거느리고 영천성을 수복하기 위한 전투에 참가하여 경상도 의병장들과 협력하고 중총(中摠)의 직책을 맡아 왜군을 크게 격파시켜 전공을 쌓았다.
그 뒤 영천에서 신령으로 이동하는 적군을 권응수와 함께 요격, 박연(朴淵)에서 대승하고 영천수복에 공을 세웠다. 용궁·비안의 전투에서도 다수의 적을 참획(斬獲)하고 병사 박진(朴晉)과 함께 경주탈환전에 용명을 떨쳤다.
이듬해 태화강(太和江)의 적군을 공격, 종일 역전하여 많은 전과를 올린 공으로 1593년 비안현감·훈련원첨정·예천군수·경상좌도병마우후를 역임하였다. 1594년 무과에 급제, 승품(陞品)되기도 전에 적군과 싸우다가 죽었다.
그 뒤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2등에 녹훈되고, 가선대부(嘉善大夫)·호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에 추증되었다. 창대서원(昌臺書院)에 제향되었으며, 공산회맹(公山會盟) 때 창화한 시 한수가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