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오천(烏川). 자는 역안(亦顔), 호는 곤봉(昆峯). 아버지는 호조참판 정삼외(鄭三畏)이며, 어머니는 수원김씨(水原金氏)로 참봉 김공필(金公弼)의 딸이다. 정구(鄭逑)·장현광(張顯光)·조호익(曺好益) 등의 문인이다.
1613년(광해군 5)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에는 아버지가 흥해에서 창의(倡義)하자 의병을 모으고 군량을 수합(收合)하는 데 많은 활약을 하였고, 또 화왕산(火旺山)의 곽재우(郭再祐)를 비롯하여 많은 의병장들과 동맹하는 데 참가하였다.
1627년(인조 5) 정묘호란 때에도 고을사람을 규합하여 창의하였으나 적이 물러갔다는 소식을 듣고 파하였다. 왜란을 겪은 뒤 학궁(學宮)이 무너지고 기강이 해이하여지자 향리의 유생들과 합의하여 학궁을 세워 사풍(士風)을 진작시켰고, 1643년 경주의 곤계봉(昆季峯) 밑에 정사(精舍)를 지어 ‘이의당(二宜堂)’이라 편액하고 아우와 함께 학문을 강론하였다.
뒤에 학행(學行)으로 계공랑(啓功郎)·사도시직장(司導寺直長)에 증직되었다. 저서로는 『곤봉집(昆峰集)』 4권과 『도통지(道統志)』·『진방명현록(震方名賢錄)』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