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사호 ()

화곡집
화곡집
조선시대사
인물
조선 후기에, 지의금부사, 경기도관찰사, 형조판서 등을 역임한 문신.
이칭
몽여(夢輿)
화곡(禾谷)
시호
충민(忠敏)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553년(명종 8)
사망 연도
1616년(광해군 8)
본관
광주(光州)
주요 관직
형조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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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조선 후기에, 지의금부사, 경기도관찰사, 형조판서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본관은 광주(光州). 자는 몽여(夢輿), 호는 화곡(禾谷). 정순인(鄭純仁)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정경(鄭褧)이고, 아버지는 장령 정이주(鄭以周)이며, 어머니는 봉원부원군(蓬原府院君)정창손(鄭昌孫)의 5대손으로 부사과 정응서(鄭應瑞)의 딸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573년(선조 6) 사마시에 합격하고, 1577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주서로 있었으나 1582년 경망(輕妄)하다는 탄핵을 받고 파직되었다. 1586년 안동부사가 되었고, 1599년 호조참의로 구관당상(句管堂上)을 겸직하였다.

대사헌으로 진하사은사(進賀謝恩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온 뒤 이조참의·동지중추부사 등을 역임하였다. 1607년 황해도관찰사가 되었으나 정철(鄭澈)의 아들 종명(宗溟)을 안성군수로 삼은 책임을 지고 파직되었다. 그러나 선조가 죽고 광해군이 즉위하자 병조참판에 복직되었다.

곧 이조참판에 올라 동지춘추관사가 되어 『선조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그 뒤 한성부우윤을 거쳐 1611년(광해군 3) 대사헌·지의금부사를 지냈으며, 1612년 평안도관찰사가 되었으나 김직재(金直哉)의 무옥(誣獄)에 연루되어 파직되었다.

이듬해 서인으로서 연흥부원군(延興府院君)김제남(金悌男)의 역모에 관련하였다는 혐의를 받았으나 죄가 없어 경기도관찰사·형조판서 등을 지냈다. 일찍이 임진왜란 때 군량을 관장하여 보급에 힘썼으며, 소를 올려 정인홍(鄭仁弘)·이이첨(李爾瞻) 등을 논책하였다.

글씨를 잘 썼으며, 작품으로는 「연성대첩비(延城大捷碑)」가 있다. 청주 수락서원(壽樂書院)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충민(忠敏)이다.

참고문헌

『선조실록(宣祖實錄)』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국조방목(國朝榜目)』
『조선금석총람(朝鮮金石總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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