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광주(光州). 자는 몽여(夢輿), 호는 화곡(禾谷). 정순인(鄭純仁)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정경(鄭褧)이고, 아버지는 장령 정이주(鄭以周)이며, 어머니는 봉원부원군(蓬原府院君)정창손(鄭昌孫)의 5대손으로 부사과 정응서(鄭應瑞)의 딸이다.
1573년(선조 6) 사마시에 합격하고, 1577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주서로 있었으나 1582년 경망(輕妄)하다는 탄핵을 받고 파직되었다. 1586년 안동부사가 되었고, 1599년 호조참의로 구관당상(句管堂上)을 겸직하였다.
대사헌으로 진하사은사(進賀謝恩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온 뒤 이조참의·동지중추부사 등을 역임하였다. 1607년 황해도관찰사가 되었으나 정철(鄭澈)의 아들 종명(宗溟)을 안성군수로 삼은 책임을 지고 파직되었다. 그러나 선조가 죽고 광해군이 즉위하자 병조참판에 복직되었다.
곧 이조참판에 올라 동지춘추관사가 되어 『선조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그 뒤 한성부우윤을 거쳐 1611년(광해군 3) 대사헌·지의금부사를 지냈으며, 1612년 평안도관찰사가 되었으나 김직재(金直哉)의 무옥(誣獄)에 연루되어 파직되었다.
이듬해 서인으로서 연흥부원군(延興府院君)김제남(金悌男)의 역모에 관련하였다는 혐의를 받았으나 죄가 없어 경기도관찰사·형조판서 등을 지냈다. 일찍이 임진왜란 때 군량을 관장하여 보급에 힘썼으며, 소를 올려 정인홍(鄭仁弘)·이이첨(李爾瞻) 등을 논책하였다.
글씨를 잘 썼으며, 작품으로는 「연성대첩비(延城大捷碑)」가 있다. 청주 수락서원(壽樂書院)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충민(忠敏)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