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영일(迎日). 자는 관여(寬汝), 호는 단오(丹吾). 경상북도 영천출신. 의병장 정환직(鄭煥直)의 아들이다.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되자 각지에 통문을 보내 일제의 침략상을 규탄하였다. 1906년 아버지가 고종으로부터 항일거병의 뜻이 담긴 밀지를 받자 아버지에게 거병을 간청하였다.
그 해 6월에 영덕으로 내려가 이한구(李韓久)·이지포(李芝圃) 등과 대구 등지에서 의병 600여 명을 규합, 거병한 뒤 청송·의성·영덕·영해·영양·평해·울진·삼척 등지를 전전하면서 일본군을 기습 공격하여 많은 성과를 거두었다.
아버지가 일본경찰에 잡혔다는 전갈을 듣고 아버지를 구하기 위하여 경주로 가던 중 경주진위대에 잡혀 대구형무소에 체수되기도 하였는데, 이는 정용기를 잡기 위한 일제의 간계였다. 고종은 정용기가 잡혔다는 소식을 듣고 칙령을 내려 곧 석방시켰다.
그 뒤 항일운동의 재기를 다짐하고 흩어진 의진을 재규합, 정비한 뒤 영덕의 신태호(申泰浩)와 합세하여 청송·영천·청하·신령 등지에서 일본헌병분파소 등을 습격하여 많은 일본군을 사살하였다.
1907년 10월 입암에서 전개된 영천수비대와의 전투에서 이한구·손영각(孫永珏)·권규섭(權奎燮) 등과 함께 일본군의 흉탄을 맞아 순절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