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영일(迎日). 자는 화백(和百), 호는 송운(松雲). 충청북도 제천 출신. 정철(鄭澈)의 후손이다.
일찍이 숙부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여러 차례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거듭 실패하였다.
1876년(고종 13) 문호개방 이후 시세를 한탄하며 영춘(永春)에 우거하였으며, 1894년 동학접주 전봉준(全琫準)이 동학농민운동을 일으키자 각처에 통문을 보내고 동학도 4명을 죽이는 한편 고을 동학접소를 소각하였다.
1895년 미우라[三浦梧樓]가 명성황후(明成皇后)를 살해하고 뒤이어 단발령을 반포하여 상투를 자르자, 유인석(柳麟錫)과 더불어 제천에서 의병을 일으켜, 유인석의 호좌의병진(湖左義兵陣)의 전군장으로 항일전선에서 활약하였다.
특히 1896년 4월 13일 호좌의병진이 제천에서 장기렴(張基濂)이 이끈 관군과의 전투에서 패한 뒤 전세가 크게 기울어졌다. 그리고 일제의 군사력이 증강되자, 이를 보완하기 위해 유인석의 지시를 받고 청나라의 위안스카이[袁世凱]를 만나 원군을 요청하기도 하였다.
유인석이 호좌의병진을 해산하고 간도로 망명한 이후, 유인석을 따라 여러 차례 간도를 다녀왔으며, 향리에 은거하면서 김호연(金昊淵)·이회승(李會升) 등과 함께 향약을 실시하여 흩어진 기강을 바로잡고 민중의 항일정신 고취에 전념하였다.
1905년 일제가 을사조약을 강요하며 침략상을 노골화시키자, 그 해 가을 이규석(李圭錫)·김홍경(金鴻卿)·강수명(姜秀明)·지원영(池源永)·김지현(金知鉉)·정해훈(鄭解薰) 등과 함께 의병 300∼400명을 소모한 뒤 단양에서 재차 의병을 일으켜 항일운동을 전개하였으나, 일제의 수비대에게 잡혀 그 해 11월 평리원(平理院)에서 15년 유배선고를 받고 유배생활을 하였다.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