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나주(羅州). 자는 사우(士優), 호는 동원(東園). 병조판서 정옥형(丁玉亨)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찬성 정응두(丁應斗)이고, 아버지는 대사헌 정윤복(丁胤福)이며, 어머니는 사헌부감찰 한경상(韓景祥)의 딸이다. 정경세(鄭經世)·이준(李埈)과 교유하였다.
1601년(선조 34) 진사가 되고, 이 해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고, 이어 이조정랑·직강·사예·전적·지평·정언·수찬·응교 등을 역임하였다. 1609년 승문원판교로 춘추관편수관을 겸하여 『선조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1611년(광해군 3) 장령·사간을 거쳐 강원도관찰사로 부정을 범한 춘천부사 이원엽(李元燁), 양양현감 신경우(申景遇)를 파직시켜 지방의 관기를 바로잡았다. 1613년 집의·전한을 지내고, 1616년 사인으로 천추사(千秋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당시 이이첨(李爾瞻)·정인홍(鄭仁弘) 등 대북파가 득세, 계축옥사를 일으켜 영창대군(永昌大君)·김제남(金悌男) 등을 죽이고, 인목대비(仁穆大妃) 폐모론이 대두되어 정세가 크게 혼란하자 상주목사로 나가면서 병을 이유로 사직하고 은퇴하였다.
1623년(인조 1) 인조반정 이후 다시 기용, 안변부사로 있을 때 이괄(李适)의 역모를 알리는 고변서에 그 이름이 기재되었으나, 아우 정호서(丁好恕)가 정주목사로서 이괄의 사자를 베고 군사를 일으켜 근왕(勤王)을 함으로써 화를 면할 수 있었다.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났을 때 파수대장(把守大將)으로 좌도의 병사를 거느리고 죽령(竹嶺)에 진을 쳤다가 강화가 성립되어 철수, 이듬해 병으로 사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