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연일(延日). 자는 자우(子羽) 또는 사서(士瑞), 호는 남애(南崖). 정시성(鄭始成)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정인빈(鄭寅賓)이고, 아버지는 판돈녕부사 정수기(鄭壽期)이며, 어머니는 윤희수(尹希壽)의 딸이다. 당시 우의정을 지낸 정우량(鄭羽良)의 동생이다.
1733년(영조 9) 사마시에 합격하여 생원이 되고, 1737년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한 뒤, 시독관(侍讀官)·응교를 지냈다. 1755년『천의소감(闡義昭鑑)』의 찬집당상(纂輯堂上)이 되었으며, 이듬해 제학을 거쳐 대제학에 올랐다.
그 뒤 호조·공조·이조·병조의 판서를 지내고 평안도관찰사로 나갔다가, 1761년 우의정이 되고 곧 좌의정에 올랐다. 1755년 나주괘서사건[羅州掛書事件: 乙亥獄事] 때 정휘량을 비롯한 소론계 온건파 대부분이 조태구(趙泰耉)·유봉휘(柳鳳輝) 등의 죄를 탄핵하여, 조태구·유봉휘는 노적(奴籍)으로 떨어뜨리고 이광좌(李光佐)·최석항(崔錫恒)도 추탈(追奪)되게 하였다. 이후 사도세자의 평양서행사건을 수습하며 자청해서 정승의 직위를 내려놓고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로 전직하였다.
정치달(鄭致達)의 숙부로서 안으로 정치달의 처인 화완옹주(和緩翁主)의 도움이 많았으며, 은밀히 김상로(金尙魯)·홍계희(洪啓禧)의 일당과 통하여 무진·기사 연간에 사설(辭說)을 일으켰다.
이들 형제는 모두 조현명(趙顯命)의 배경으로 대신의 지위에 올랐으며, 또 대제학을 역임하여 문명이 높았다. 시호는 문헌(文憲)이다. 저서로는 『남애집(南崖集)』·『견사록(見思錄)』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