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영무 ()

퇴촌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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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사
인물
조선전기 개국공신 3등, 정사공신 1등에 책록된 공신. 무신.
이칭
시호
충무(忠武)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미상
사망 연도
1414년(태종 14)
본관
한양(漢陽: 지금의 서울)
주요 관직
병조전서(兵曹典書)|영삼군부사(領三軍府事)|우정승
관련 사건
정몽주살해|조선개국|왕자의 난
정의
조선전기 개국공신 3등, 정사공신 1등에 책록된 공신. 무신.
개설

본관은 한양(漢陽). 중국에서 귀화한 조지수(趙之壽)의 고손으로, 할아버지는 조순후(趙珣厚)이고, 아버지는 조세진(趙世珍)이다. 개국공신 1등 조인옥(趙仁沃)과 개국공신 2등 조온(趙溫)이 그 당내이다. 그들의 출세에 힘입어 한양을 본관으로 하게 되었다.

생애와 활동사항

1392년(공양왕 4) 이방원(李芳遠)의 명으로 조영규(趙英珪) 등과 함께 정몽주(鄭夢周)를 격살한 뒤 그 해 이성계를 추대, 조선 개국에 공을 세우고 판전중시사(判殿中寺事)에 올라 개국공신 3등에 책록되었으며, 한산백(漢山伯)에 봉했졌다. 1394년(태조 3) 상의중추원사(商議中樞院事)로서 강계등처도병마사(江界等處都兵馬使)를 겸임하고, 1397년 충청도도절제사가 되었다. 이듬해 제1차 왕자의 난 때, 이방원을 도와 주1 1등에 봉해졌다. 이방원의 극진한 총애를 받아 판중추원사 · 의흥삼군부중군동지절제사(義興三軍府中軍同知節制使)를 거쳐 참찬문하부사에 승진하였다.

1400년(정종 2) 도독중외제군사도진무(都督中外諸軍事都鎭撫)로 병권을 장악, 제2차 왕자의 난에도 이방원을 도와 주2 1등에 봉해졌다. 사병 혁파가 실시될 때 이를 거부하고 무기를 수납하는 군관을 구타했다가 황주에 유배되었으나, 곧 풀려나와 서북면도순문사 겸 평양부윤으로 나갔다. 그 뒤 판삼군부사(判三軍府事) · 권행의정부사(權行議政府事) · 판승추부사(判承樞府事)를 거쳐 영승추부사(領承樞府事)로 병조전서(兵曹典書)를 겸임하였다.

1405년 우정승에 올랐으며, 이듬해 판이병조사(判吏兵曹事)를 겸직한 뒤 1408년 부원군(府院君)에 진봉되었다. 1409년 훈련관도제조(訓鍊觀都提調)를 지내고, 영삼군부사(領三軍府事)가 되어 병으로 사직하였다. 1412년 수군첨절제사에 임명된 박영우(朴英祐)의 위임거부로 물의가 일어나자 추천한 장본인으로서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으나, 이듬해 우정승에 복직되었다. 죽은 뒤 태종의 묘정에 주3되었다. 시호는 충무(忠武)이다.

참고문헌

『고려사(高麗史)』
『태조실록(太祖實錄)』
『정종실록(定宗實錄)』
『태종실록(太宗實錄)』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주석
주1

조선 태조 7년(1398)에 일어난 제일 차 왕자의 난을 평정한 공신에게 내린 훈호(勳號). 정종 때에 방의(芳毅)ㆍ방간(芳幹)ㆍ방원(芳遠) 등 12명에게 일등 공신을, 심종(沈悰)ㆍ이지란 등 17명에게 이등 공신의 책록을 내렸다. 우리말샘

주2

조선 태종 1년(1401)에 이저(李佇), 이거이(李居易) 등 46명에게 내린 훈명. 정종 2년(1400) 제이 차 왕자의 난 때 박포 등의 무리를 평정하고 태종을 임금 자리에 오르게 한 공로로 주어졌다. 우리말샘

주3

공신의 신주를 종묘에 모시는 일. 우리말샘

관련 미디어 (3)
집필자
한영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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