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태허(太虛), 호는 매계(梅溪). 조경수(曺敬修)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조심(曺深)이고, 아버지는 울진현령 조계문(曺繼門)이다. 어머니는 유문(柳汶)의 딸이다. 7세에 이미 시를 지을 정도로 재주가 뛰어나 족숙 조석문(曺錫文)이 불러 가숙에 머물러 독서하도록 하였다.
1472년(성종 3) 생원 · 진사시에 합격하고, 1474년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 승문원정자 · 예문관검열을 역임하였다. 성종 때 실시한 사가독서(賜暇讀書)에 첫 번으로 뽑히기도 하였다. 그 뒤 홍문관의 정자 · 저작 · 박사 · 수찬, 사헌부지평 · 시강원문학 · 홍문관교리 · 응교 등을 차례로 거친 뒤, 어머니 봉양을 위해 외직을 청하여 함양군수가 되었다.
이어 의정부검상 · 사헌부장령을 거쳐 동부승지가 되었다가 도승지에 이르고, 호조참판 · 충청도관찰사 · 동지중추부사를 역임하였다. 1498년(연산군 4)에 성절사(聖節使)로 명나라에 다녀오던 중, 무오사화가 일어나 김종직(金宗直)의 시고(詩稿)를 수찬한 장본인이라 하여 오랫동안 의주에 유배되었다. 이후 순천으로 옮겨진 뒤, 우리나라 유배가사의 효시라고 일컬어지는 「만분가(萬憤歌)」를 지었으며, 그곳에서 죽었다.
김종직과 친교가 두터웠으며 초기 사림파의 대표적 인물이었다. 함양군수 때는 조부(租賦)를 균등하게 하기 위해 『함양지도지(咸陽地圖志)』를 만든 것으로 전하는데, 이는 김종직이 선산부사로 있을 때 『일선지도지(一善地圖志)』를 만든 것과 같은 일이다. 또, 유향소(留鄕所)의 폐단을 바로잡기 위해 향사례(鄕射禮) · 향음주례(鄕飮酒禮)를 실행하자고 건의하기도 하였다. 박식하고 문장이 위려(偉麗)하여 문하에 많은 문사가 배출되었다.
1495년에는 어머니의 묘지명을 친필로 돌에 쓰고 새겼는데, 조위가 찬한 「정부인 문화류씨묘지명 지석(貞夫人文化柳氏墓誌銘誌石)」은 2006년 경상북도 유형문화재(현, 유형문화유산)로 지정되었다. 유배 중에도 저술을 계속, 『매계총화』를 정리하다가 죽었다. 작품으로 「조계문묘비(曺繼門墓碑)」가 있고, 저서로 『매계집(梅溪集)』이 있다. 경상북도 김천의 경렴서원(景濂書院)에 제향되었으며, 충청북도 영동군 황간의 송계서원(松溪書院)에 주벽으로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장(文莊)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