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2년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현, 유형문화유산)로 지정되었다. 관악산의 지맥인 국사봉 북쪽 기슭 서울특별시 동작구 상도동에 위치해 있다. 묘역은 11,888평에 건평 9평인 사당을 비롯한 3동의 건물과 묘 1기로 구성되어 있다. 1972년 8월 30일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고, 재단법인 지덕사(至德祠)에서 관리하고 있다.
지덕사는 앞툇마루가 놓인 3칸의 사당을 중심으로 전면 마당 좌우측에 제사당 서고 및 제기고를 두었다. 마당 전면에는 삼문을 두고 담장을 둘러 외부와 구분하고 있다. 사당의 뒤편에 양녕대군과 정경부인 광산 김씨(光山金氏)를 합장한 묘소가 자리하고 있다.
봉분 앞에는 장명등과 묘비 및 문인석이 좌우에 2기씩 서 있다. 양녕대군은 유언으로 호화로운 예장을 받지 말고 묘비와 상석을 만들지 말라 했는데 7대손 김만(金曼)과 8대손 김성항(金性恒)이 묘소 앞에 석물을 세웠다 한다. 하지만 그 때 세운 묘비가 1910년 경술국치 전날인 8월 28일 밤 난데없이 벼락소리와 함께 갈라졌다고 한다. 현재의 묘비는 1915년에 다시 세운 것이다.
사당 안에는 세조 어제(御製)의 금자현액(金字懸額), 허목(許穆)의 지덕사기(至德祠記), 정조 어제 지덕사기, 양녕대군이 친필로 쓴 소동파(蘇東坡)의 후적벽부(後赤壁賦) · 팔곡병풍 목각판 및 대군의 필적인 숭례문(崇禮門) 탑본 등이 보관되어 있다.
지덕사는 1675년(숙종 1) 양녕대군의 외손인 우의정 허목의 건의로 남대문 밖 서부 도저동에 세웠다. 이 때 건축된 지덕사는 남관왕묘 건너편에 위치하고 있었다. 현재 서울시 용산구 후암동 일대다. 다음해 건물이 완성되어 지덕사라 이름하고 사적을 지어 현판을 써서 걸었다.
지덕이란 이름은 『논어』권8 태백편(太白篇)의 “태백은 지덕이다.”고 칭한 공자의 말에서 유래되었다. 이 고사는 주나라 대왕 때에 상(商)이 약해지고 주가 날로 강해질 때의 일이다. 대왕에게는 아들 셋이 있었다. 대왕은 셋째 계력(季歷)에게 왕위를 계승시켜 천하를 도모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장자 태백과 차자 우중(虞中)이 형만(荊蠻)의 땅으로 몸을 숨겨 계력으로 하여금 왕위를 잇도록 하였다. 양녕대군과 효령대군이 동생 충녕대군을 왕위에 오르게 하고자 방탕과 탁불(托佛)한 것을 고사와 비교해서 양녕의 행동을 태백의 지덕으로 명명한 것이다.
1757년(영조 33) 영조는 양녕의 후손인 이지광(李趾光)을 불러 초임직을 주고 퇴락한 사당을 보수하게 했으며, 직접 제문을 짓고 치제하였다. 1789년(정조 13) 정조는 사액했고, 직접 지덕사기를 지어 현판에 써서 걸도록 하였다. 사당은 1912년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