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경창 ()

한문학
인물
조선 중기에 삼당시인 중 한 사람으로 『고죽유고』를 저술한 시인.
이칭
가운(嘉運)
고죽(孤竹)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539년
사망 연도
1583년
본관
해주(海州)
출생지
전라도 영암
주요 저서
고죽유고
내용 요약

최경창은 조선 전기 삼당시인 중 한 사람으로 『고죽유고』를 저술한 시인이다. 본관은 해주, 자는 가운, 호는 고죽, 전라도 영암 출생이다. 당시에 뛰어나 백광훈·이달과 함께 삼당시인으로 불렸다. 송시풍에서 당시풍으로의 전환을 통해 우리 한문학사의 분기점을 이룩한 중심인물이다.

정의
조선 중기에 삼당시인 중 한 사람으로 『고죽유고』를 저술한 시인.
가계 및 인적 사항

최경창(崔慶昌, 1539~1583)의 본관은 해주(海州), 자는 가운(嘉運), 호는 고죽(孤竹)이다. 전라도 영암 출생으로, 최충(崔冲)의 18대손이며 최자(崔滋)의 13대손이다. 아버지는 최수인(崔守仁)이다. 박순(朴淳)의 문인(門人)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최경창은 백광훈 · 이후백(李後白)과 함께 양응정(梁應鼎)의 문하(門下)에서 공부했다. 1555년(명종 10) 17세 때에 을묘왜란(乙卯倭亂) 당시 왜구를 만났는데, 최경창이 퉁소를 구슬피 불어 왜구들을 향수에 젖게 하여 물리쳤다는 일화(逸話)가 전할 정도로 퉁소를 잘 불었다고 한다.

1561년(명종 16) 23세 때부터 성균관 생원[上庠]이 되어 성균관에서 공부했다. 1568년(선조 1)에 증광문과에 주5로 급제하여 주6가 됐다. 주7 · 주8원외랑(員外郎)을 거쳐 1575년(선조 8)에 사간원정언에 올랐다. 1576년(선조 9) 영광군수(靈光郡守)로 좌천(左遷)되자 충격을 받고 사직(辭職)하였다.

다음 해에 대동도찰방(大同道察訪)으로 복직(復職)했다. 1582년(선조 16) 53세에 선조가 종성부사(鍾城府使)로 특별히 제수(除授)했다. 그러나 북평사의 무고(無辜)한 참소가 있었고 주16에서 갑작스러운 승진을 문제 삼아서 선조는 성균관직강으로 고치도록 명했다. 최경창은 상경(上京) 도중에 종성 주19에서 죽었다. 저서로 주30가 있다.

최경창은 학문과 문장에 능하여 이이(李珥) · 송익필(宋翼弼) · 최립(崔岦) 등과 무이동(武夷洞)에서 서로 시를 주고받았다. 또한 정철(鄭澈), 서익(徐益) 등과 삼청동(三淸洞)에서 교류했다.

작품 경향과 특징

최경창은 당시(唐詩)에 뛰어나, 백광훈 · 이달과 함께 주22으로 불렸다. 송시풍(宋詩風)에서 당시풍(唐詩風)으로의 전환을 통해 우리 한문학사의 분기점을 이룩하는 데에 중심이 되었다. 호남 지역의 문화적 분위기 속에서 당시를 수용하여, 시 창작에 있어서 까다로운 수사(修辭)와 난해한 주24의 사용을 배제하고 자신의 삶에서 우러나온 솔직한 정서를 이해하기 쉬운 언어로 표현하였다.

특히 그의 시는 그의 인성에서 나와 시 속에 쓸쓸한 작가의 심사나 가을과 같은 심경이 시 내면과 통합되어 ‘청한(淸寒)’이 시의 주된 정조(情操)를 이루고 있다. 그의 시는 청절하고 담백하다는 평을 받았는데, 백광훈과 이달의 시와 비교할 때 ‘한경(悍勁, 기세가 빠르고 꿋꿋하다)’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최경창은 문장에도 뛰어나 이이 · 송익필 등과 함께 8문장으로 일컬어졌으며, 서화(書畫)에도 뛰어났다.

상훈과 추모

숙종 때에 청백리(淸白吏)주27되고, 강진(康津) 서봉서원(瑞峯書院)주29 되었다.

참고문헌

원전

『선조실록(宣祖實錄)』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논문

안병학, 「최경창의 시세계와 삶의 안정성에 대한 회의」(『태동고전연구』 2, 한림대학교 태동고전연구소, 1986)
최명환, 「고죽최경창론」(『동악어문논집』 17, 동악어문학회, 1983)
주석
주1

문하에서 배우는 제자. 우리말샘

주2

가르침을 받는 스승의 아래. 우리말샘

주3

조선 명종 10년(1555)에 전라남도 해남군에 있는 달량포(達粱浦)에 왜선(倭船) 60여 척이 쳐들어온 사건. 이 사건을 계기로 비변사가 상설 기구가 되었다. 우리말샘

주4

가는 대로 만든 목관 악기. 세로로 내려 불고 앞에 다섯 개의 구멍, 뒤에 한 개의 구멍이 있다. 본디 아악기인 소(簫)를 개량한 것으로, 아래위로 통하는 소(簫)라는 데서 나온 이름이다. 향악(鄕樂)의 독주 악기로 널리 쓴다. 우리말샘

주5

조선 시대에, 과거 합격자를 성적에 따라 나누던 세 등급 가운데 둘째 등급. 정원은 일곱 명으로, 정팔품의 품계를 받았다. 우리말샘

주6

조선 시대에, 함경도에 있는 북병영에 속한 정육품 무관 벼슬. 함경도 병마절도사의 보좌관이다. 우리말샘

주7

고려 시대에, 육조(六曹) 가운데 의례(儀禮), 제향(祭享), 조회(朝會), 교빙(交聘), 학교(學校), 과거(科擧) 따위에 대한 일을 맡아보던 관아. 공양왕 원년(1389)에 예의사를 고친 것이다. 우리말샘

주8

고려 시대에, 육조(六曹) 가운데 무선(武選), 군무(軍務), 의위(儀衛) 따위에 관한 일을 맡아보던 관아. 이전의 군부사를 고친 것으로, 그 뒤 여러 차례 이름을 고쳤다. 우리말샘

주9

신라 때에, 집사성에 속한 벼슬. 경덕왕 18년(759)에 사지(舍知)를 고친 것으로 혜공왕 12년(776)에 다시 사지로 고쳤다. 우리말샘

주10

전라남도 영광군의 행정을 맡아보는 으뜸 직위에 있는 사람. 또는 그 직위. 우리말샘

주11

낮은 관직이나 지위로 떨어지거나 외직으로 전근됨을 이르는 말. 예전에 중국에서 오른쪽을 숭상하고 왼쪽을 멸시하였던 데서 유래한다. 우리말샘

주12

맡은 직무를 내놓고 물러남. 우리말샘

주13

물러났던 관직이나 직업에 다시 종사함. 우리말샘

주14

추천의 절차를 밟지 않고 임금이 직접 벼슬을 내리던 일. 우리말샘

주15

남을 헐뜯어서 죄가 있는 것처럼 꾸며 윗사람에게 고하여 바침. 우리말샘

주16

조선 시대에, 대관과 간관을 아울러 이르던 말. 우리말샘

주17

조선 중기의 시인 최경창의 시집. 손자 최진해(崔振海)가 수집하고 증손 최석영(崔碩英)이 간행하였다. 우리말샘

주18

지방에서 서울로 감. 우리말샘

주19

나그네를 치거나 묵게 하는 집. 우리말샘

주20

서울특별시 종로구에 있는 동. 종로구의 중앙부, 북악산의 남동쪽에 위치해 있다. 문화재로 기기국 번사창(機器局飜沙廠), 삼청동문(三淸洞門) 등이 있다. 우리말샘

주21

중국 당나라 때의 시인들이 지은 시. 이때 5언, 7언의 율시(律詩)와 절구(絕句) 같은 근체시(近體詩)의 양식이 완성되었다. 우리말샘

주22

조선 중종과 선조 대에 걸쳐 시명(詩名)을 떨친 세 사람의 시인. 백광훈, 최경창, 이달을 이른다. 우리말샘

주23

말이나 글을 다듬고 꾸며서 보다 아름답고 정연하게 하는 일. 또는 그런 기술. 우리말샘

주24

전례(典例)와 고사(故事)를 아울러 이르는 말. 우리말샘

주25

진리, 아름다움, 선행, 신성한 것을 대하였을 때에 일어나는 고차원적인 복잡한 감정. 지적ㆍ도덕적ㆍ종교적ㆍ미적 정조 따위로 나눈다. 우리말샘

주26

글씨와 그림을 아울러 이르는 말. 우리말샘

주27

벼슬 따위에 추천하여 관리로 뽑음. 우리말샘

주28

전라남도 강진군에 있는 읍. 강진군의 중서부에 위치해 있다. 서쪽과 북쪽은 200~500미터의 산지로 둘러싸여 있고, 동쪽과 남쪽은 탐진강의 하류 지역으로 기름진 넓은 들이 있다. 남해안의 곡창 지대이며, 주로 쌀ㆍ보리를 생산한다. 군내의 교통 중심지이자, 농산물 집산지이며, 행정ㆍ문화의 중심지로 발전하고 있다. 4일과 9일에 장이 선다. 문화재로 강진 향교, 강진 남강사 주자 갈필 목판 일괄, 강진 옥련사 목조 여래 좌상, 강진 영랑 생가, 강진 금강사, 고성사, 남강 서원, 주자 갈필각, 화수각 등이 있다. 강진군의 도청 소재지이다. 면적은 50.91㎢. 우리말샘

주29

받들어 배향함. 우리말샘

주30

조선 중기의 시인 최경창의 시집. 손자 최진해(崔振海)가 수집하고 증손 최석영(崔碩英)이 간행하였다. 우리말샘

관련 미디어 (3)
• 본 항목의 내용은 관계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단,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미디어ID
저작권
촬영지
주제어
사진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