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7년(충렬왕 3) 탐라(耽羅)에 크게 기근이 들었을 때 위무차 순시하였다. 이후 벼슬이 누진하여 승평부사(昇平府使)가 되었다가 임기가 차서 1281년(충렬왕 7)에 비서랑(秘書郎)이 되었다.
승평부의 풍속에 읍의 수령이 갈릴 때마다 반드시 말을 주었는데, 부사(府使)는 8필, 부사(副使)는 7필, 법조(法曹)는 6필씩 마음대로 골라가게 하였다. 임기를 마치고 돌아가게 되자 고을사람들이 관례에 의하여 말을 고르기를 청하였다.
그러나 말을 고르지 않았을뿐더러 고을사람들이 억지로 딸려 보낸 말을 서울에 도착해서 다시 돌려보내니, 그 뒤로는 그러한 폐단이 없어졌다고 한다. 이때 8필의 말을 보냈는데 오던 도중 새끼를 낳아 9필이 되니 모두 돌려보내어 고을사람들이 그 덕을 칭송하여 비석을 세워 팔마비(八馬碑)라 이름하였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