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승에 따르면, 충주 남산성(忠州 南山城)은 삼한시대에 마고선녀(麻姑仙女)가 7일 만에 성을 쌓아 마고성(麻姑城)이라 부른다고도 하며, 백제 개로왕 21년(475) 성 아래 북쪽의 안림동(安林洞)에 개로왕이 이궁(離宮)을 짓고 남산에 성을 쌓았다고 하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그러나 성벽의 축조 방식이나 출토된 유물 등을 종합하여 볼 때, 충주 남산성은 신라가 북진한 이후인 7세기 말 충주 지역의 경영과 관련하여 축조한 산성으로 볼 수 있다. 특히 산성 내부에서 고려시대 및 조선시대의 유물은 발견되지 않아 통일신라 말기에는 폐성된 것으로 본다.
충주 남산성(忠州 南山城)은 충주산성(忠州山城), 금봉산성(金鳳山城) 등으로도 불리는데, 충주산성이라는 명칭은 고려시대 몽고가 침입했을 때 산성방호별감(山城防護別監) 김윤후(金允侯)가 군민과 함께 승리한 곳이라 추정되고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그러나 조사 · 발굴 결과 대몽항쟁기의 유구와 유물은 출토되지 않았다. 충주 남산성과 관련해서는 오히려 조선시대 지리지의 동악성(桐岳城, 東岳城) 관련 기록이 주목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주의 동쪽 13리에 있다. 돌로 쌓았고, 둘레가 2,280척이며, 안에는 샘이 있으나, 지금은 폐지되었다”라는 기록이 있다.
1984년 지표조사를 통해 남산성의 기본적인 현황이 파악되었다. 이후 1986년부터 2016년까지 7차례에 걸쳐 발굴 조사(發掘調査)가 진행되어 산성의 구조 및 성격을 밝혀낼 수 있었다.
충주 남산성은 충주 분지의 동남쪽에 있는 남산(해발 636m) 정상부에서 북동쪽으로 이어지는 두 개의 계곡 상단 부분을 둘러싼 석축 산성이다. 산성이 있는 곳은 현재 충청북도 충주시 목벌동과 안림동 일원이다. 충주 남산성에서는 북서쪽으로 충주 시가지와 남한강 및 달천 유역을 넓게 조망할 수 있다. 동쪽으로는 남한강 상류 지역인 제천 · 단양으로부터 남한강의 수계를 따라 충주 지역으로 넘어오는 교통로를 내려다보며 제어할 수 있고, 서남쪽으로는 조령과 이화령을 넘어 충주로 북상하는 교통로를 관장할 수 있다. 즉 남산성은 교통의 요충지에 들어선 산성이다.
남산성의 전체 둘레는 약 1,120m이며, 평면의 형태는 굴곡이 심한 부정형(不定形)이다. 성벽은 전체 구간에 잘 남아 있는데, 조사 결과 외벽 기저부에서 일정한 높이까지는 편축으로 조성한 후 성벽의 중간 지점 이상부터는 내외 협축(夾築)의 방식으로 쌓은 것이 밝혀졌다. 남은 성벽의 상태로 볼 때, 높이 약 68m 정도로 성벽을 쌓은 것을 알 수 있다. 성벽 상면의 너비는 약 6.26.4m이며, 그곳에는 평여장(平女牆)을 설치한 것이 확인되었다. 또한 체성벽은 두께 15~20cm 내외의 세장방형(細長方形) 성돌을 수평 눈줄에 맞추어 정연하게 축조하였다.
문지는 동서남북에 각 1개소씩 총 4개가 확인되었다. 4개의 문지 모두 현문식(懸門式) 성문이다. 특히 북문지의 바닥에서 확쇠 및 광두정(廣頭釘) 등이 출토되었는데, 이를 통해 문구부의 너비가 2.7~2.8m에 이르고, 성문의 두께가 약 17cm였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었다. 충주 남산성의 수구는 성벽 통과식으로, 입수구에서 출수구 바닥까지 계단식으로 조성되었다. 그 밖에 동문지 주변에서는 저수 시설 등이 확인되었는데, 동쪽 계곡부에서 문지 방향으로 모이던 물이 방벽을 거쳐 집수지에 모였다가 배수구를 통해 빠져나갈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
현재 남아 있는 석축 성벽과 출토된 유물로 볼 때, 충주 남산성은 6세기 중엽 신라가 북진한 이후 7세기 말부터 충주 지역을 거점화하면서 축조한 것으로 판단된다. 특히 7세기 이후 통일신라시대에 이 산성을 주로 사용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충주 남산성은 충주 분지 및 인근의 소백산맥 방면 교통로를 관장할 수 있는 교통의 요충지에 들어서 있다. 산성의 이러한 지리적 입지는 신라의 북진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즉 충주 남산성은 7세기 말 신라의 북진 이후 신라의 충주 지역 경영과 관련 있는 중요한 유적이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