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과에 합격하자마자 선전관에 제수되고 겨우 20개월만에 도사(都事)가 되는 등 승진이 빨랐다. 1517년(중종 12)에는 영일현감으로서 사냥을 즐기기도 하였으나, 도(道)에 마음을 두고 고을 다스리기에 청렴근신 하였다는 평을 들었다.
그 이듬해에는 진해현감으로 재직하면서 선정을 펼치는 등 실적이 현저하여 여러 차례 승지에 천거되기도 하였다. 1519년 12월에는 특별히 가자하고 김해부사에 제수되었다. 그러나 기묘사화가 일어나 김식(金湜) 등이 무함을 입었을 당시에 자급(資級)이 강등되어 칠원현감으로 좌천되었다.
그는 김해부사로 재직시 도망 중에 있던 김식을 김해부의 아내(衙內)와 그의 본가에 숨겨 주었다는 사실이 이신의 고발로 탄로나 체포되었으나 일시 도망하였다가 다시 체포되어 처형당하였으며 가산은 적몰되었다.
1573년(선조 6) 10월에 사헌부가 벼슬을 회복시키고 적몰한 가산을 환급해 줄 것을 계청하기 시작하였으며, 여러번의 요청 끝에 결국 그 해 11월에 가서야 이를 허락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