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공칙(公則), 호는 남강(南崗). 증승지 한홍주(韓弘澍)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증이조참판 한진(韓鎭)이고, 아버지는 돈녕부도정(敦寧府都正) 한수경(韓守慶)이며, 어머니는 사의(司議) 유조의(柳祖誼)의 딸이다.
1566년(명종 21)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예문관에 등용되었다. 예조좌랑·장령·좌승지·전라도관찰사·호조참판 등을 지냈다. 1588년(선조 21) 우참찬이 되어 성절사(聖節使)로 명나라에 다녀와 황해도관찰사가 되었다.
이듬해 안악군수 이축(李軸), 재령군수 한응인(韓應寅) 등이 연명으로 정여립(鄭汝立)의 모역사건을 알리는 고변서(告變書)를 조정에 비밀장계로 올렸다. 그 공으로 1590년 평난공신(平難功臣) 2등이 되고 좌참찬에 올라 청천군(淸川君)에 봉하여졌다.
1592년 임진왜란 때 호조판서로 순화군(順和君)을 호종, 강원도로 피난하였고, 이듬해 한성부판윤에 전임되었으며, 진하 겸 주문사(進賀兼奏聞使)로 다시 명나라에 다녀와 이조판서가 되고, 1595년 사은 겸주청사(謝恩兼奏請使)로 또다시 명나라에 다녀왔다.
글씨를 잘 써서 사자관(寫字官)을 지냈고, 광주(廣州)의 「우언겸묘표(禹彦謙墓表)」를 썼으며, 필적으로 모간(模刊)한 것이 있다. 평소 교유(交遊)를 즐기지 않았으며, 근면하고 검소하여 죽은 뒤 장사를 치를 돈이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시호는 정익(靖翼)이다.